2023년 4월 14일 금요일

여섯 번째 인터뷰 - 읽는 사람 소양

1. 숲 속의 방
 
2023217일 금요일 서울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부근에 위치한 한옥카페 반하당의 다락에서 소양 님과 인터뷰를 가졌습니다. 소양 님은 저와 낭독모임을 같이 하는 분입니다.
 
브루넷: 이 인터뷰에 어떤 이름으로 나오는 게 편하세요? 소양으로 할까요?
 
소양: . 소양이 제 본체예요.
 
브루넷: 언제부터 쓰신 닉네임이에요?
 
소양: 중학생 때부터요. 제 트위터 계정을 그때 만들었어요. 예고를 가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브루넷: 트위터 하는 십대셨구나.
 
소양: 수능 본 날도 -수능이 저한테는 크게 중요한 것도 아니었지만- 수능 본 날까지도 트위터를 하고 있었어요. 하하.
 
브루넷: 트위터 안 하신 지 꽤 된 것 같아요.
 
소양: 해요. 하는데...
 
브루넷: 트윗을 안 쓰시더라고요.
 
소양: 무슨 말을 해야 될지 잘 모르겠어요.
 
브루넷: 왜 그렇게 된 거예요? 신중해진 건가요, 공부하다보니까?
 
소양: 그럴 수도요. 사실 다른 계정이 있기도 해요.
 
브루넷: , 정말?
 
소양: 취미 계정이 있어요. 보셔도 돼요.
 
브루넷: 취미가 뭐예요?
 
소양: 집에서 차 마셔요.
 
브루넷: 제가 느끼기로는 대학원 가신 뒤로 부쩍 트윗이 줄어든 것 같아요.
 
소양: 어서 졸업하고 시끄러운 계정으로 돌아와야 되는데. 하하.
 
브루넷: 공부할수록 어떤 사안에 관해 단언하기가 어렵잖아요. 학문하는 사람 특유의 조심스러움이 있나 보다 했어요.
 
소양: 그런 것도 있겠지만 제 타임라인에 대학원생도 수두룩빽빽해요.
 
카페 직원: 맛있게 드세요.
 
소양: 뭐라고 할까. 소양은 제 본체예요. 저를 제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제 생활반경 안에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브루넷: 소양의 양은 무슨 양(), () 할 때의 양인가요?
 
소양: 옛날에 강석경 작가-
 
브루넷: 숲 속의 방의 소양이에요?
 
소양: .
 
브루넷: 세상에.
 
소양: 어릴 때 동생하고 오랫동안 방을 같이 썼어요. 고등학생 때까지도 제 방이 없었어요. 집에 가면 지금도 제 방이 없어요.
 
브루넷: 딸 독립했다고 부모님께서 가차 없이 방을 없애버리셨나요?
 
소양: 제 방이 원래 한 번도 없었다가 이사를 하고 집에 처음으로 방이 세 개가 돼서 제 방이 일시적으로 생겼는데 부모님이 사업을 하시기 때문에 그 방이 창고가 됐어요. 물류보관창고. 제가 동생이랑 사이가 안 좋은데, 아니, 사이가 안 좋다기보다 성격이 달라요. 같은 반에 있으면 절대 친구 안 할 것 같은 그런 여자애 둘이서, 예민한 여자애 둘이서 방을 같이 쓰니까 문제가 많았죠. 그것 때문에 평소부터 독립하고 싶고 자기만의 방을 갖고 싶었어요. 어떻게든 빨리 독립을 해야겠다 싶었어요. 부모님과 갈등이 있었을 땐 더 그랬고. 어쨌든 이라는 말에 항상 꽂혔던 것 같아요. 울프의 자기만의 방도 아주 어릴 때부터 갖고 있었어요. 마트에서 엄마 기다리면서 책 한 권 고르라고 해서 고른 건데 그때는 어려워서 못 읽었어요. 소설이라 생각하고 샀는데 소설도 아니고.
 
브루넷: 연설문이죠.
 
소양: 강석경의 숲 속의 방은 중고등학생이 읽는 한국단편선 같은 것 있잖아요. 시험 준비용으로 읽히는 책이요. 거기서 읽고 나중에 단행본도 샀어요.
 
브루넷: 386 대학생들이 많이 보던 책인데. 저는 대학생 언니 책꽂이에서 보고 읽었어요. 너무 재밌었고 소양이 또 강렬했죠.
 
소양: 소양이 아주 강렬한 캐릭터죠.
 
브루넷: 닉네임 처음 봤을 때 숲 속의 방이 떠오르긴 했는데 진짜 그 소양이었다니.
 
소양: 중학생 때는 예민한 캐릭터에 이입했던 거죠. 좀 크고 나서 보니까 소양의 언니가 둘이잖아요. 화자인 언니가 있고 다른 언니는 의사고. 알고 보니 저는 그 화자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어요. 미양.

브루넷: 제가 받은 인상도 그래요.
 
소양: 그래서 제 다른 계정 이름이 미양이에요.
 
브루넷: 인터뷰에 써도 될까요?
 
소양: . 정말 차 마시는 것만 하는 계정이라서.
 
브루넷: 학교 이름은 노출해도 돼요?
 
소양: , 해도 될 것 같아요.
 
브루넷: 나중에 정리한 것 보시고 가렸으면 좋겠다 싶으면 또 말씀해주세요.
 
소양: 옛날에는 그걸 어떻게 얘기해야 될지 잘 몰랐어요. 문학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다소 민감한 얘기거든요.
 
브루넷: 학교 어디 다녔다는 게요?
 
소양: 예고 출신인지. 문창과 제도 안에 있었는지.
 
브루넷: 대학 급 나누는 것과 비슷한 얘긴가요?
 
소양: 그렇다기보다 얼마나 이 제도 안에 있는지와 관련된 것 같아요. 등단, 미등단 이런 것과 비슷하게 내가 얼마나 이 안에 속한 사람인지. 자신이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민감하게 느끼는 거죠.
 
브루넷: 내부자들이 외부자들을 쳐내는 용도로 쓰지 않아요?
 
소양: 전혀 그렇진 않은데 밖에서 볼 때는 쟤들끼리 뭘 형성한다고 아니꼽게 볼 것 같아요.
 
브루넷: 그것도 젊어서 얘기지 더 나이 들면 대학하고 삶이 너무 멀어져서 옛일이 돼버려요.
 
소양: 한국에서 문학을 하는 삶은 대학과 가까운 삶인 것 같아요. 보통의 다른 삶보다.
 
브루넷: 생계유지 방편으로 학교 강사를 많이들 하셔서 그럴까요?
 
소양: 그렇기도 하고 문학장에서 이 사람이 어디 출신인지 스캔하는 것 같아요.
 
브루넷: 웹소설이 커지면서 그 판도가 바뀌지 않았을까요?
 
소양: 웹소설 작가들은 자기노출 없이 소설로만 승부하는 분들이죠. 그런데 출판문학은 작가의 인물 자체에 기대잖아요. 작가를 구성하는 게 너무 중요하지 않나요?
 
브루넷: 백수린, 최은영, 손보미, 김금희... 모두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인데 다들 광고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조건을 갖고 계시긴 하네요.
 
소양: 학벌도 좋고요. 한국문학에서 독보적이라고 상찬 받는 배수아 작가는 작품도 독보적이지만 그 작가의 행보 자체가 사람을 끌잖아요. 만약 그가 서울에서만 살고 서울의 독립서점을 전전하면서 독자들과 밀접하게 자주 북토크하고 알라딘TV 같은 데 나온다면? 그런 배수아가 상상되세요? 배수아가 만약에 처음부터 그랬다면 지금의 배수아가 안 됐을 걸요. 배수아에 대한 거리감이, 배수아에 대한 신비감이 배수아라는 작가를 만들어낸 것 같다. 그런 거죠.
 
 
2. 낭독모임
 
브루넷: 우리 모임 얘기해볼까요? 제가 트위터에 올린 낭독모임 공고를 보고 오셨죠?
 
소양: 항상, 옛날부터 브루넷 님 계정을 애독하고 있었어요. 제가 졸업하고 나서 처음 디엠을 드렸는데 사실 그전에 고전낭독을 하고 계셨잖아요.
 
브루넷: 맞아요. 일리아스읽고 그랬어요.
 
소양: 그때도 하고 싶었는데 졸업하느라 바빠서 못 했어요. 할 수 있게 된 다음에 바로 연락드린 거예요.
 
브루넷: 저희가 시 모임으로 시작했죠?
 
소양: 김혜순 시인으로요.
 
브루넷: 처음에 어떠셨어요?
 
소양: 조심스러웠죠. 사람들이 트위터로 보면 차가워 보이잖아요. 트위터 사람들이 그런 거리감을 좋아하는 거고요. 그래서 트위터 사람들 만날 때 항상 조심하죠. 처음 만나는데다가 심지어 댁으로 가는 거라 긴장됐어요. 그런데 이 인터뷰 오기 전에 제 블로그 일기를 찾아봤는데, 낭독모임에 가게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 쓴 일기가 있더라고요. 거기에 이렇게 적혀 있었어요. “이 모임에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내가 하고 있는 모임들 중에 가장 좋아하는 모임이 된 것 같다.”
 
브루넷: 하하.
 
소양: 모든 면에서 좋았어요. 일단 낭독을 해서 작품을 소화한다는 아이디어가 좋았어요. 제가 학교 다닐 때 친구들과 이런 걸 해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됐어요. 사실 사람 모으기가 쉽지 않잖아요. 요즘에는 낭독모임들이 좀 생겼지만 그때만 해도 사람들이 낭독에 별로 매력을 못 느끼는 것 같았어요. 저는 낭독을 좋아하거든요. 낭독을 하는 것도 좋아하고 낭독 잘하는 사람이 해주는 걸 듣는 것도 좋아해요.
 
브루넷: 일상에서 그럴 기회가 많지 않죠. 보통 묵독하니까.
 
소양: 시에 대해 얘기하는 것도 좋았어요.
 
브루넷: 문창과 나오셔서 그런 기회는 많으셨을 것 같은데요.
 
소양: 문창과 안에서 얘기하다보면... 물론 이런 건 좋아요. 보통 사람들은 일단 시를 안 읽고 시에 대해 얘기를 안 해요. 그런데 문창과 사람들은 시를 읽으면 그 시어가 주는 질감에 대해 이야기한단 말예요. 어디 가서 시의 질감 얘기를 하겠어요. 그걸 정말 별별 방식으로 말해요. 마치 촉각할 수 있는 것처럼 그 질감에 대해 얘기를 하고 너무 좋아해요. 그런 건 좋았죠. 그런데 사람들이 문학이라고 할 때 그 문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각자 공유하는 것에 따라, 각자 어느 버블에 있느냐에 따라 너무 달라요. 저는 예고를 나왔기 때문에 그 예고 버블 안에서 제가 익힌 게 있어요. 대학에서 만난 문창과 친구들은 예고 출신도 아니고 과외도 안 받았기 때문에 출강하시는 어떤 선생님이 제가 봤을 땐 거의 문단의 아이돌인데도 애들은 이 사람이 왜 위대한지 몰라요. 그래서 막 욕을 해. , 나는 빨리 내 시부터 쓰고 싶은데 왜 옛날의 좋은 것들을 알고 써야 된다고 하는 거지? 왜 그렇게 고리타분한 걸 읽히는 거지? 이해를 못 해요. 나는 이 선생님의 무수한 추종자들을 익히 알고 있지만, 얘들은 어, 그렇구나. 그런 기반이 없는 친구들은 전혀 다르게 보고 어떤 건 이해를 못하는구나.
 
브루넷: 다양한 관점은 좋았겠어요.
 
소양: 공부를 너무 안 했죠. 아무튼 각자의 버블들 안에서 공유하는 어떤 생각들이 있는데 말하자면 저희 낭독모임에서는 그런 게 없는 상태에서 시를 읽은 거죠. 문창과를 다닐수록 그런 의견에 노출되기가 어려워요. 그것 때문에 다질도 이 모임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문학 공부하고 전공한다고 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얘기는 사실 뻔해요. 비슷비슷한 얘기가 돌게 되는 것 같아요.
 
브루넷: 왜 그럴까요?
 
소양: 비슷비슷하게 읽는 방식을 익힌 거죠. 얼마 전에 문학 행사에 갔다 왔는데 제가 문창과 출신이라고 얘기하니까 , 저는 시에 대해서 배워본 적도 없고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 저도 시에 대해 배운 적이 없어요. 다질도 그렇게 생각할 걸요. 배운 적이 없어요. 제가 시 전공이 아니라서 그런 것도 있을 거예요. 저는 소설 전공이고 시에 대해 별로 진지하지 않아서 공부를 한 적도 없어요. 그런데 어쨌든 이런 게 시적인 건가 보다, 라고 공유하는 전제들은 있죠. 예를 들어 고등학교 때 시 전공한 친구들이 이런 걸 좋아하면 아, 이런 게 시구나. 그냥 이런 감을 잡는 거죠. 옆에서 누가 시를 읽어주면 이런 게 시인가보다. 이런 게 정말 좋다고 하면 아, 이런 게 좋은 건가보다. 그런 걸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는 환경이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선입견을 쌓는 거죠. 저는 시를 배워본 적이 없어요. 시를 가르쳐주는 학교도 어딘가 있을 수 있지만 제가 나온 문창과 선생님들은 시를 안 알려주는 선생님들이셨어요. <시란 무엇인가>라는 수업이 필수과목이어서 1학년 때 들었는데 강의하시는 선생님이 맨날 수업 시작할 때마다 시가 뭐예요?” 물었어요. 그러면 학생들이 뭐라고 얘기할 거 아녜요. 그러면 그건 왜 그렇죠?” 또 물어요. 학생들이 모르겠어요.” 할 때까지. 시가 뭔지 모르겠다는 얘기를 들으려고 계속 묻는 거예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해봅시다, 하는 스타일이셨고 그 분 수업을 제가 좋아했죠. 그리고 또 다른 시 선생님은 우리가 시 수업이긴 하지만 반드시 시라는 형식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가진 분이셨어요. 그래서 시가 무엇인지 이론을 정립해서 배운 적이 없어요. 그냥 많이 읽은 거죠. 시를 읽는 사람들이 있는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던 거죠. 저는 정말 배운 적이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아이, 그게 배운 거지.” 생각할 수도 있고요.
 
브루넷: 저는 소양과 다질 모두 문창과 나오셨다고 해서 처음에는 긴장했는데 금방 편해졌어요. 두 분 모두 낭독모임을 좋아하고 아껴주셨어요. 우리 모임의 튼튼한 두 기둥이세요. 모임에 대해 얘기를 더 나눠보고 싶은데요, 강제성 없는 모임은 오래 유지되기가 쉽지 않잖아요. 파토나기 쉽죠.
 
소양: 너무 쉬워요.
 
브루넷: 저는 이 모임이 정기적으로 열리고 꾸준히 유지된다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운 좋게도 구성원들이 잘 모였다는 생각도 하고요.
 
소양: 이 모임에 누군가를 데려온다거나 소개한다고 할 때 조심스러워지는 부분이 있어요.
 
브루넷: 왜요?
 
소양: 우리 모임은 읽기라는 목적에 충실한 것 같아요. 그래서 정말로 낭독할 사람을 데려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독서모임이라는 게 독서 외에 다른 측면에서 도움이 될 수도 있겠죠. 정서적인 도움을 줄 수도 있겠고요. 그렇지만 이 모임은 와서 낭독을 할 사람이어야 한다는 게 중요한 조건인 것 같아요.
 
브루넷: 여타 독서모임과 다른 점이 그 부분이죠. 우리는 책을 읽는다. 감상을 나누기보다는.
 
소양: 감상도 즉흥적으로 공유하기는 하지만 정말 책을 읽는다.
 
브루넷: 맞아요. 그것은 제가 기존 독서모임들에 질려서 그래요. 헛소리에. 헛소리가 지금 생각하면 꼭 나쁜 건 아닌데 그때는 정말이지...
 
소양: 듣다 보면 밑도 끝도 없죠.
 
브루넷: 모임에서 누군가가 말을 독점하는 게 싫고 불편했어요. 낭독을 하면 돌아가며 골고루 텍스트를 읽으니까 나쁘지 않겠다 싶었는데 역시 나쁘지 않더라고요. 이런저런 독서모임을 해봤지만 저한테는 이 방식이 맞아요.
 
소양: 낭독모임에 참여하고 싶었던 이유를 들자면 사실 저는 정말로 브루넷 님. 읽는 관점이 정말 좋았어요. 저는 음침하고 이상한 변태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흥미로운 얘기를 한다 그러면 찾아가서 정말 뭐라고 하는지 들어봐야겠는 마음이 있어요.
 
브루넷: 그래서 와봤는데 나쁘지 않았다?
 
소양: 너무 재밌었죠. 브루넷 님 댁에서 했을 때 굉장히 환대 해주셨잖아요.
 
브루넷: 저는 집에서 하는 모임을 좋아해요. 울산 살았을 때 한살림 같은 생활협동조합 모임들을 했는데 그때는 집에서 모이는 게 자연스러웠어요. 주로 전업주부들이고 유자녀 기혼여성들이니까 애 데리고 어디 가느니 돌아가면서 집에서 했어요. 언니들이 텃밭에서 뽑아온 채소들로 음식 해주고. 그때는 제가 제일 어렸고 그런 문화에 제가 좀 냉소적이었어요. 뭘 그렇게까지 하나. 그런데 서울 와보니 이제는 제가 그러더라고요. 저는 가급적 돈 안 드는 모임을 하고 싶었어요. 회비 없고 뒤풀이 안 하고 책은 도서관에서 빌릴 수 있는 흔한 책으로 해서 커피 값, 책 값 부담스러운 사람도 올 수 있는 모임이길 바랐어요. 지금도 집에서 하고 싶은데 저희 집이 썩 접근성 좋은 편이 아니라 할 수 없이 광화문으로 잡았죠.
 
소양: 그런 아이디어가 좋아요. 무상으로 한다는 게. 친구들이 집에 초대해주면 정말 고마워요. 서울에서 젊은 여자가 산다는 것은 저의 경우 주거가 몹시 취약한 것이기 때문에 저는 아무도 집에 초대한 적이 없어요.
 
브루넷: 동거인도 계시고 코로나 시기도 길었잖아요.
 
소양: 집이 누구에게 보여줄 꼴이 아니다가 사실은 큰 거예요. 주거 취약이라는 게. 차라리 공간대여를 하는 게 서로 마음 편한 것도 있어요.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누가 초대를 해주면 무척 고맙죠. 보여주는 거니까.
 
브루넷: 지금까지 낭독모임에서 읽었던 작품 중에서는 뭐가 마음에 남아요?
 
소양: 재미로 따지면 에밀리 디킨슨이요. 굉장히 짧은 시여서 읽다가 시에 대해 치고 들어가기도 좋았고 재밌는 에피소드도 많았던 것 같아요.
 
브루넷: 지영 님이 백합 구근 가져와 나눠주고 가신 날도 있었죠.
 
소양: 그때 재밌었어요. 또 지영 님이 디킨슨 시집의 하얀 표지가 내용과 어울리지 않는다며 노란 크레용으로 다 칠해서 덮으셨잖아요.
 
브루넷: 파란 크레용이요.
 
소양: , 파란 색이었나요? 그런 식의 책 아트는 제가 상상도 못했던 것이기 때문에 놀랐어요. 저도 책에 메모는 하고 책 귀퉁이를 접기도 하지만 책에 그림은 안 그리거든요. 그런데 그런 구성원이 있으니까 저도 애벌레가 나오는 시 옆에 애벌레를 그렸어요. 제가 책 읽으면서 그래본 적이 없었거든요. 디킨슨 시집을 여러 권 계속해서 읽으면서 그 작가와 친숙해지는 느낌도 좋았어요.
 
브루넷: 우리 다 여러 권씩 읽었잖아요. 김혜순도, 최영미도.
 
소양: 디킨슨 읽을 때 소소한 일화들이 많아서 즐거웠나 봐요. 텍스트 자체보다 그런 일들이 기억에 남아요. 최근에는 처의 감각도 재밌었죠. 이걸 어떻게 이해할까 싶었는데 같이 읽어 보니 재밌었어요. 그리고 입센도. 입센은 텍스트가 너무 좋으니까요.
 
브루넷: 입센의 바다에서 온 여인읽었죠?
 
소양: 그 작품은 너무 재밌어서 좋다 어떻다 판단하기도 전에 그냥 빨려 들어갔어요.
 
브루넷: 입센 작품 다 그래요. 전 입센 전집이 읽고 싶어요.
 
소양: 읽었으면 좋겠어요.
 
브루넷: 전집 읽기가 끌리는 소수 애호가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지겨워하며 모임에 안 나오기 시작하기 때문에 선뜻 읽자고 하기가 어려워요. 하지만 입센. 너무 하고 싶다.
 
소양: 마침 전집도 나왔고.
 
브루넷: 번역도 좋거든요. 기존 입센 번역들과 비교할 수 없이 좋아요. 잘 모를 때는 제가 체홉을 제일 좋아할 줄 알았는데 막상 작품을 읽어보니 체홉보다 입센에서 큰 감동을 받았어요. 인형의 집읽기 전에는 뻔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하나도 안 뻔했어요. 끝내줬어요.
 
소양: 너무 잘 쓰죠. 입센은 압도적으로 재밌었어요. 그리고 모임에 새로 들어오신 분들 낭독스타일이 재밌어서 최근에 정말 좋아요. 사람들이 역할에 몰입해서 읽을 때 참 재밌는 것 같아요.
 
브루넷: 연극적인 낭독을 안 좋아하는 분들도 계세요. 하지만 그냥 무덤덤하게 읽다가도 갑자기 감정이 확 북받칠 때가 있죠.
 
소양: 작품을 읽어 나가는 동안 인물 해석을 하게 되잖아요.
 
브루넷: 희곡의 기승전결을 따라가다 보면 몰입되어 버리죠. 그러라고 설계된 작품들이고요.
 
소양: 카릴 처칠의 미친 숲도 재밌었어요. 모임에서 안 읽어봤던 유형의 텍스트였는데, 한 작품 안에 다양한 요소가 들어 있었어요.
 
브루넷: 앞으로 읽어보고 싶은 작품도 많으시죠?
 
소양: 새로 나온 에밀리 디킨슨 시집도 읽고 싶어요.
 
브루넷: 디킨슨이 번역되는 속도를 우리가 못 따라가고 있어요.
 
소양: 입센도 더 읽고 싶고 코르네유, 라신, 몰리에르 같은 프랑스 고전 극작가들 읽기도 해보고 싶어요.
 
브루넷: 사실 라신을 두 작품만 읽고 넘어가서 아쉬웠습니다. 하하.
 
소양: 학교 다닐 때 못한 공부를 더 한다는 느낌으로 하고 싶은데.
 
브루넷: 그러려면 아마 낭독모임 내에 또 소모임을 만들어야 될 거예요.
 
소양: 희곡도 재밌지만 시 낭독도 참 좋았어요. 시를 낭독할 기회가 평소 잘 없으니까요.
 
브루넷: 시집 한 권을 다 읽는 경우가 드물긴 하죠.
 
소양: 시를 읽는다고 했을 때 제가 읽고 싶은 사람은, 이름이 갑자기 생각이 안 나는데 그... 앤 섹스턴. 너무 읽고 싶어요. 예를 들어 쉼보르스카도 참 좋았지만 쉼보르스카는 혼자 읽어도 좋다는 걸 느낄 수 있잖아요.
 
브루넷: 한국 남성 독자가 읽어도 좋아할 수 있는 작가죠, 쉼보르스카는.

소양: 앤 섹스턴은 낭독모임에서 읽었을 때 좋은 시너지가 나올 것 같아요.
 
브루넷: 트위터 분이 번역하시지 않았나요?
 
소양: 정은귀 선생님이요.
 
브루넷: 수영하는 분.
 
소양: 아닌 것 같아요.
 
브루넷: (그렇습니다. 수영하는 트위터친구 선생님이 번역하신 시집은 뮤리엘 류카이저의 어둠의 속도인데 제가 착각을 했습니다.)
 
소양: 앤 섹스턴은 민음사에서 나온 게 있고 봄날의 책에서 나온 두꺼운 전집이 또 한 권 있어요. 자기 정신과 치료에 대해서도 쓰고 여성으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자신에 대해 쓰고 섹슈얼리티에 대해서도 굉장히 다양하게 썼어요. 알고 싶은 시인인데 요즘 읽을 시간이 너무 없기 때문에 모임을 통해 읽고 싶어요.
 
브루넷: 낭독모임에서 같이 읽으면 혼자 읽는 것보다 훨씬 오래 걸리지만 대신 기억에 오래 남더라고요.
 
소양: 훨씬 풍부하게 읽을 수 있고요.
 
브루넷: 책은 혼자 읽으면 되는데 독서모임 같은 걸 왜 하는지 모르겠다는 트윗도 봤어요. 그런가? 내가 독서모임 하는 것도 허영인가? 했는데...
 
소양: 아유, 그 사람이 가여운 거죠. 이런 즐거움을 모르고 사니까.
 
브루넷: 낭독에 참여해본 사람만이 누리는 즐거움이 있지 싶어요.
 
소양: 이런 모임이 되려면 여러 우연이 맞아 떨어져야 되거든요.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3. 연애담
 
브루넷: 질문지로 가볼게요. 소양 님의 성 정체성에 관해 이야기해주실 수 있으세요?
 
소양: 저는 정말로, 정말로 바이섹슈얼이에요. 정말로 바이섹슈얼이란 말이 웃긴데 중학생 때 그걸 알았어요. 제가 우울한 중학생이었는데, 이성애 규범이라는 말을 몰랐을 때부터 힘들었던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 어떤 남성과의 관계가 아니더라도 한국에서 여자애로 산다는 건 이성애 규범에 맞아야 하는 것 같아요. 어릴수록 더 그렇고요. 저는 지금도 키가 크지만 어릴 때부터 너무 컸어요. 여자애가 키 큰 게 이상하게 여겨지는 것도 그거잖아요. 남자애들이 여자애보다 더 커야 할 것처럼 생각하는 것. 저는 그것도 이성애 규범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실제로는 여자애들 발육이 더 빠르잖아요. 그런데도 여자애가 크면 좀 이상하다는 것 속에는 여자애는 어때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있어요. 저는 항상 키가 컸고 항상 덩치도 크고 항상 힘도 셌어요. 그런 게 문제가 됐어요. 여자애가 그렇다는 게.
 
브루넷: 미디어가 바람직하다고 보여주는 여자아이 상과 맞질 않으니까.
 
소양: 저는 십대 남자애들을 이해하기 힘든 것 같아요. 지금도 이해하기 힘들고 제가 십대였을 때도 십대 남자애들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브루넷: 십대인 사람을 이해하기 어려운 게 아니라요?
 
소양: 남자애들을 이해하기 어려워요. 걔들을 이해하기 위한 어떤 방법이 필요한 것 같아요.
 
브루넷: 인간 하나하나가 다 이해하기 어렵지, 십대 남성만 특히 그런가요?
 
소양: 저는 좀 이해하기 어려웠고 지금도 그런 것 같아요. 여자애들은 십대 때부터 SNS 열심히 하고 싸이월드도 열심히 쓰고 자기 흑역사를 남기는데 십대 남자애들은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에 그런 걸 남기지도 않고 그런 게 없다고 얘기하는 걸 봤어요. 저는 반은 동의하고 반은 동의 못해요. 걔네들도 인간이야. 왜 생각이 없겠어요. 인간인데 당연히 생각이 있죠. 그런데 그런 차이가 생기기는 하잖아요. 걔네들이 어떤 생각을 하든지 간에 생각 없는 애들 정도로 이해가 되는 거죠, 사회적으로.
 
브루넷: 저는 성별과 나이로 묶이는 특성은 없다고 생각해요. 십대 남성의 성욕 같은 것도요. 저만 해도 일이십 대 때 성욕이 정말 강했거든요.
 
소양: 저도요.
 
브루넷: 남녀 차이가 너무 과장된 게 아닌가 싶어요. 한때는 여자애들이 남자애들보다 낫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여자를 지나치게 이상화했던 거죠.
 
소양: 그러면 다시 정리해서 얘기할게요. 뭐냐면 십대 여자애로서 십대 남자애들과 만날 적절한 대화방식이 저한테 없었어요. 여자애들 사이에서 모범생 정도로는 존재할 수 있었지만 내가 한국사회에 적절한 여자애는 아닌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해요. 남자들을 만났을 때 그런 게 아직 남아 있어요.
 
브루넷: 전형적인 남녀 연애관계는 안 맞고 그렇다고 친구로 지내기에도 딱히.
 
소양: 안 되고.
 
브루넷: 그럼 여자친구가 많아요?
 
소양: . 실은 제가 십대 때 좋아했던 남자애가 있었어요. 남자는 걔만 알고 싶지, 다른 남자애들은 꼴도 보기 싫다고 생각했어요. 걔들은 지저분하고 하는 짓도 경박하고 시끄럽고 어쩌고저쩌고. 그런데 여중을 갔더니 나는 양성애자구나, 라는 걸 알게 된 거예요. 그냥 알게 됐어요. 여자들이랑 있는 게 너무 만족스러워서.
 
브루넷: 많은 한국여자들이 여자들끼리 있는 걸 편안해하고 좋아하잖아요?
 
소양: 저는 금방 눈 뜬 거죠. 나는 정말로 여자애들을 성적으로 좋아하네. 여자애들이 더 센스가 있고 더 유머코드가 맞고 잘 통하고 이런 수준이 아니라 통하지 않는 여자도 너무 좋다! 우울한 중학생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그거는 행복했어요. 내가 여자도 좋아한다. 페미니스트로서도 제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게 도움이 돼요. 여자인 저 자신을 좋아하기가 더 수월해져요. 예를 들면 한국사회 전반에 이상적인, 규범적인 여성상이 있잖아요. 정말 어처구니없는 이상한 기준, 이해할 수 없는 기준들도 많이 있잖아요. 그게 내가 아니라 어떤 여자라고 생각해봐. 오히려 좋아! 이럴 때도 있단 말예요. 그게 나일 때는 약간 나도 좀 매끈하게 여자로 존재하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아니, 그렇지 않고 다른 여자라고 생각해봐. 오히려 좋아. 그렇게 되는 게 있어요. 저희 모계가 하체 비만이 있어요. 한국여자들이 서로 서로 막 그러잖아요. 허벅지가 어떻고 다리가 어떻고. 십대 때는 난 평생 이런 몸으로 살아야 하는구나, 이런 생각도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여자를 좋아하고 나니까 나는 오히려 그런 여자가 좋아. 그러면 나를 좋아하기가 너무 쉬운 거예요. 진짜로. 나는 그런 여자가 너무 매력적인데? 맞아. 매력적인 거야, 이거는. 그리고 매력적이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 좋은 것 같아. 여자들이 그런 거 괜찮은 것 같아. 저는 그런 거가 도움이 돼요.
 
브루넷: 차별금지법도 통과 못 시키는 나라에서 힘들지는 않아요?
 
소양: 그런 걸 민감하게 느끼는 친구들도 있는데 저는 그렇지는 않아요. 그건 각자 삶의 맥락에서 생겨나는 차이 같아요. 저는, , 그런 것 같아요.
 
브루넷: 부모님이 억압하지 않으셨어요?
 
소양: 그랬죠. 고등학교 때 그랬었는데 그것도 지금 돌이켜보면 다 맥락이 있어요. 얼마 전에 그런 생각을 했어요. , 엄마아빠가 날 너무 사랑했었나 보다. 십 년 지나니까 그 생각이 들어요. 딸이 잘못될까봐 걱정했던 것 같아요. 예고를 보내놨더니 얘가 여자를 사귀고 있어. 동성애자가 될 것 같아. 저는 반발심에 좋게 말 못 하고 어쩔 거야이런 식으로 들이받았어요. 엄마는 너무 놀랐죠. 저희 엄마는 너무나 이성애자 여자예요. 너무 여자예요. 작년에 가족 여행을 갔는데 엄마가 이런 얘길 하셨어요. 너희 아빠 죽으면 난 남자 없이는 못 살 것 같아. 남자 있는 게 좋아. 막 이렇게 얘길 해버렸어요. 아빠 바로 옆에 있는데. 엄마는 진짜 이해를 못 했던 것 같아요. 진짜로. 여자랑 손을 잡거나 껴안는 게 왜 좋니? 어유, 징그러워. 이해가 안 가. 이런 거였던 것 같고, 아빠는 리버럴한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아빠 생각에는 제가 너무 이르게 성적인 행동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화가 났던 거예요. 그런 화였던 거예요. 그런데 그 화를 두 분 다 부적절하게 표출했죠. 저희 엄마는 여자친구 어머니한테 전화해서 정말로 심한 폭언들을 퍼부었고 아빠는 저한테 손찌검한 적이 없는데 그럴 정도로... 학교를 안 보낸다고 하셨어요.
 
브루넷: 두 분이 소양 님을 너무 사랑했다기보다 그냥 크게 잘못하신 건데요?
 
소양: 잘못했죠. 그런데 왜 그랬나를 생각해보면 그랬던 것 같아요. 잘못될까봐 걱정한 것 때문에 잘못 표현을 했다. 그 전까지 저는 엄마아빠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내 엄마아빠라서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괜찮은 사람들인 것 같다고. 그런데 고등학생 때 그런 일이 생기고 나니까 견딜 수가 없었어요. 너무 폭력적이고. 저한테 한 거는 제 선에서 제가 혼자 소화하면 되는 거지만 그런 폭력에 다른 사람들까지 연루되었기 때문에. 그러고 나서 몇 년 동안은 사이가 안 좋았어요. 지금은 괜찮아졌어요. 더 이상 그것 때문에 엄마아빠가 밉진 않아요. 그러고 나서 엄마아빠가 정말 후회를 했다는 게 직접 얘기 안 해도 느껴져요. 벌써 십 년이나 지났고 그 사이에 열심히 미워했고 사과도 충분히 받았어요.
 
브루넷: 떨어져 지낸 것도 도움이 되었을 것 같아요.
 
소양: . 심리적인 여유가 생겨요.
 
브루넷: 저는 전해 듣기만 하는데도 힘든 얘기예요.
 
소양: 힘들었죠. 그때 방학 레슨을 갔어야 됐는데 너 선생님한테 방학 레슨 못 간다고 얘기해. 그리고 학교 옮겨. 집 가까운 데로.’ 그리고 핸드폰이랑 노트북, 연락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뺏겼어요. 애가 갑자기 학교를 관둔다니까 선생님은 놀라셨죠. 선생님이 해결해주셨어요. ‘어머니, 애들이 십대 때 그럴 수 있어요. 십대 때 있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성장과정이에요.’
 
브루넷: 꼭 그런 건 아니잖아요. 하하.
 
소양: 선생님이 임기응변으로 그냥 그렇게 얘기하신 거죠. 그리고 어머니, 저 소양이가 없으면 수업 못 합니다. 소양이가 수업 열심히 듣고 어쩌고 얘기해 가지고 다니게 됐죠. 나중에 엄마아빠가 걔는 대학 어디 썼냐고 하는데 너무 화가 났어요.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얘기할 수가 있지? 걔랑 나 사이를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지금? 그런 생각이 드니까 너무 화가 나고 싫었어요. 아빠한테 정말 화를 낸 적도 있어요. 그걸 가지고 화낸 건 아니고 다른 구실 하나를 잡아서 아빠한테 심하게 화를 냈어요. 저희 아빠는 마음이 약한 사람인데. 그때 심지어 이모부가 옆에 있었는데 아빠한테 막 소리를 지르면서 화를 냈어요. 아빠가 울 때까지. 저희 아빠는 딸이 소리 지르며 화를 내면 우는 사람인 거죠.
 
브루넷: 그런 갈등의 시기가 있었구나.
 
소양: ...우는 사람인 거죠. 그런데 저희 엄마도 만만찮은 사람이어서 그날 밤 저한테 와서 소리 지르셨어요. ‘너 어떻게 내 남편한테 함부로 할 수 있어? 아무리 네가 내 딸이어도 그건 용납 못 해.’ . 진짜 이 사람은... 내 엄마지만 참 뭘까.
 
브루넷: 어머니 입장에서는 남편이 불쌍했겠죠.
 
소양: , 하하. 왜 내 남편한테 그래! 하지만 나는 당신 딸인데. 이제는 엄마는 그냥 그런 여자야. 그런 여성이야. 이렇게 이해를 해요. 그리고 엄마아빠가 몇 년 동안 애를 썼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저는 그런 게 다 싫었어요. 엄마가 캐롤봤니?’ 캐롤있잖아요. 케이트 블란쳇 나오는. 그거 봤냐고. 되게 너 좋아할 것 같은 영화다.
 
브루넷: 짜증을 어떻게 참았어요?
 
소양: 처음엔 내가 뭐라 하길 바라는 거지? 왜 그런 식으로 에둘러 얘기하지? 그냥 형식적으로 대답했는데 다 지나고 나니까 그것도 엄마 나름의 노력이고 표현이었다고 느껴요. 물론 그거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죠. 다른 사람이 연루되어 있기 때문에 그 용서가 저한테 달려 있는 것도 아니에요.
 
브루넷: 이성애에 신물 난 여성들, 특히 한국남자의 미숙함과 폭력성에 넌덜머리난 여성들이 여자들의 사랑을 미화해서 말하는 걸 볼 때 어떤 기분 들어요?
 
소양: 여자와 사귀고 있는 다른 친구한테 근데 여자들이 지랄 맞은 것도 솔직히 맞지 않냐.’고 들은 적이 있어요. 여자와 사귄다는 것은 그 지랄을 감당하는 거예요. 그게 힘든 거예요. 하하.
 
브루넷: 매달 나만 겪는 생리전증후군도 힘든데 이제 같이 겪어야 되는?
 
소양: 그런 것도 있고 그... , 사람을 굉장히... 수동공격성이라고 할 수도 있고. 사람을 구워삶아서 통제하는 방식 있잖아요. 사람을 세밀하게 통제하려고 하는 거요. 그런 게 레즈비언 연애에 많이 있죠. 나를 다 이해해주는 그 모든 민감함은 나를 비난할 때도 똑같이 발휘될 수 있어요. 여자들이 남자들을 최악으로 대할 때 있잖아요. 그런 걸 서로 주고받아야 할 수도 있는 거죠. 여자와 사귀면.
 
브루넷: 남자친구와 사귀면서는 그 부분이 편했어요?
 
소양: 남자와 사귀어서 편한 건 아니고 오십 자체가 수월한 사람이에요. 처음에는 제가 엄마아빠에 대한 반감이 너무 컸기 때문에 이 연애 시작할 때만 해도 사귄다는 말도 안 했어요. 그냥 친구가 어학연수 가는데 고양이 봐줄 사람이 없어서 나 들어가 살 거라고 얘기하고 나왔어요.
 
브루넷: 그때 처음으로 집에서 나오신 거죠? 몇 학년 때였어요?
 
소양: 대학교 3학년? 4학년?

브루넷: 부모님은 뭐라고 하셨어요?
 
소양: 제가 그냥 통보한 거였어요. 그냥 그럴 거야, 라고 했어요. 그러면 어떨까 상의를 구하는 태도가 아니었어요.
 
브루넷: 부모님이 꽉 막힌 분들은 아닌가 봐요.
 
소양: 저를 꽉 막힌 여자애라고 생각하기에는 두 분이 이미 겪으신 게 있기 때문에.
 
브루넷: 부모가 강경하게 반대할 수도 있잖아요. 돈을 안 준다거나.
 
소양: 저희 집에 딸이 둘이거든요? 어릴 때는 잘 몰랐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부모님께서 저를 너무 사랑하셨어요.
 
브루넷: 큰 딸이라 수혜를 좀 받으셨나요?
 
소양: 너무 수혜를 받았죠. 제 동생이 고등학생 때 중국어를 배우고 싶다고 했어요. 유망한 언어니까 가르쳐줘도 되잖아요. 그런데 엄마가 허락 안 해줬어요. 그런데 제가 대학생 때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러시아어 학원 다니겠다고 했을 때는 지원해주셨어요.
 
브루넷: 그나마 자매라 다행이다. 소양 님이 아들이었으면 동생 분 너무 힘들었겠어요.
 
소양: 제가 사실상 아들로 큰 거죠. 집안 어른들도 노골적으로 저를 편애하셨어요. 저는 대학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았어요. 대부분 성적 장학금이었고 어쨌든 받을 수 있는 여건에 있었던 건데 동생은 의정부에 있는- 사실 저는 동생이 정확히 어느 과를 나왔는지도 잘 몰라요.
 
브루넷: 정말 먼 관계구나.
 
소양: 걔가 뭘 생각하며 사는지도 몰라요. 걔는 중학생, 고등학생부터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만약 제가 한다고 했으면 엄마아빠가 말렸을 것 같은데 동생한테는 일하는 것도 사회경험이니까 하라고 하셨어요. 저는 정말 경제관념이 없는데 동생은 돈의 중요성을 매우 잘 아는 사람으로 컸어요. 자매인데. 그럴 수밖에 없게 컸어요. 저는 되게 이기적으로 살아왔어요. 가족들 안에서. 지금 대학원 다니는 것도 다 부모님이 지원해주셔서 다니는 거예요.
 
브루넷: 동생은 직장생활해요?
 
소양: . 자기가 나온 학교에서 조교를 하다가 지금은 다른 곳에서 일하고 있어요. 어릴 때는 공부를 싫어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사이버대학에서 공부도 더 하고 있어요. 성실해요.
 
브루넷: 중고등학생이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한다는 것도 보통 성실함이 아니거든요. 소양 님은 지금 공부 중이고 동생은 취업했잖아요. 그러면 평가가 역전되는 순간이 올 수도 있어요.
 
소양: 그렇죠. 그런데 저희 집안에서는 그냥 소양이는 공부를 좋아했으니까 공부 하는구나 그래요. 공부해서 어디 쓸 거냐고 하는 사람은 없어요. 생각은 할 수 있겠지만 대놓고 그러지는 않아요. 저희 부모님은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할 수 있을 만큼 하라고 하세요. 아빠는 심지어 제가 대학원 가겠다고 했을 때 한 학기 해보고 안 맞으면 나와도 되니까 해보고 싶으면 하라고 해주셨어요.
 
브루넷: 그런 부모님과 척지기는 힘들 것 같다. 소양 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시네요.
 
소양: 제가 입은 수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그렇기도 해요. 아빠는 오십을 좋아하세요. 제가 오십 만나고 나서 인상이 폈다고.
 
브루넷: 결혼 얘기는 안 하세요?
 
소양: 사실혼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오십 부모님들도. 어머님과 가끔 연락하거든요. 연락이라기보다 새해인사, 명절인사를 하는 거죠.
 
브루넷: 진일보했네요. 옛날에는 동거에 입대는 인간도 많았어요.
 
소양: 저랑 오십이랑 비슷해요. 부모님들도 비슷해요.
 
브루넷: 집안 내 포지션이요?
 
소양: .
 
브루넷: 동거라는 형식이 잘 맞아요? 지금 칠 년 째인가요?
 
소양: . 다른 게 별로 상상이 안 가요. 혼자 살면 무서울 것 같아요. 솔직히.
 
브루넷: 결혼은 상상이 가요?
 
소양: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일부러 생각 안 하려고 해요. 결혼에 대해 생각하면 결론이 결혼일 것 같아요. 제도적으로 이득이 있다면 당연히 그쪽으로 가려고 하겠죠? 그쪽으로 생각이 계속 끌려 갈 것 같아요. 그래서 생각을 안 하려고 해요. 하고 싶다, 하고 싶지 않다가 아니라. 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까? 달라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그런데 꼭 해야 돼? 이런 느낌. 그냥 지금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은데.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사는 게 괜찮은데 왜 다른 식으로? 저는 여자를 사귈 때도 결혼하고 싶단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어요. 어릴 때 엄마한테 결혼을 왜 했냐고 물어봤는데 너무 사랑해서 옆에다가 붙잡아 놔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는 거예요. 전 몹시 낭만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아, 정말로 사랑이라는 것은 그렇게 취약한 거구나. 묶어놓지 않으면 날아갈 것 같다니. 그런 건 진짜가 아니야. 난 진짜를 할 거야. 하하. 지금 생각해보면 유치한 생각이에요. 엄마아빠는 사랑한 거죠. 그런데 그냥 이렇게 얼레벌레 사는 삶도 괜찮아지면 안 되나? 그게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 아닌가? 그럼 나는 그냥 이렇게 살고 싶다.
 
브루넷: 결혼했다고 얼레벌레 안 하고 똑부러지게 사는 것도 아녜요.
 
소양: 그렇긴 한데 뭔가 꼭... 하여튼... 별로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요.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결혼을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브루넷: 저희 세대만 해도, 특히 동갑 커플이거나 여자가 연상인 커플에서 그랬는데, 서른이 다가오는데 남자 쪽에서 결혼하자는 얘기를 한 마디도 안 꺼내면-
 
소양: 그것도 불안하잖아요.
 
브루넷: 그럴 때 여자들이 느끼는 불안감이 좀 있었어요.
 
소양: 지금도 그렇죠.
 
브루넷: 지금도 그래요? 그런 불안감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없어진 게 너무 좋거든요? 그건 마치 여자의 이십대를 크리스마스 케이크에 비유하는, 뭐 그런 거잖아요. 워낙 성차별이 심한 사회니까 그런 초조함에 시달리는 여자들도 이해가 가지만 그게 결국은 출산을 생각할 때 나의 생체시계가 점점 뭐,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요새는 출산을 생각하는 여자들이 별로 없으니까.
 
소양: 요새는 출산보다는.
 
브루넷: ?
 
소양: 그런 것 같아요. 생산 가능한 나이일 때 어쨌든 결혼을 해놔야 더 이상 임노동을 할 수 없을 때 기댈 곳이 있을 것이다. 그게 없어진 다음에 찾으면 너무 늦는다. 오히려 이런 게 더 많은 것 같아요.
 
브루넷: 기혼한테 주어지는 혜택들이 있으니까요. 주택부터 해서.
 
소양: 있겠죠.
 
브루넷: 동성커플들은 그런 혜택들을 못 누리고 특히 한쪽이 죽었을 때 문제죠.
 
소양: 그래서 그냥 어쨌든... 아마도... 모르겠어요. 예전에는 오십이 결혼하고 싶어 할 거라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모르겠어요. 안 물어본 지 오래 돼서. 생각이 바뀌었을 수도 있잖아요. 동성결혼이 돼야 결혼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은 것도 있어요. 파트너쉽 제도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생활동반자 정도면 충분한 것 같아요. 결혼이라는 게 제도적인 것도 있지만 역사적인 것까지 다 딸려 오는 거잖아요. 결혼을 한다는 것. 부부가 된다는 것. 이 사람이 나의 남편이 된다는 것. 이 인간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 등등 관계를 좌우하는 요소가 너무 많은 것 같아요.
 
브루넷: 결혼하면 주말과 명절도 그전까지와는 다르게 느껴지죠.
 
소양: 그런 것들이 딸려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손해 보기 싫은 심리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어쨌든 지금은 결혼 할 수도 없죠. 신고만 하면 되는 거지만 생각하기도 싫고 모르고 살고 싶어요. 그런 혜택이든 뭐든 모르고 살면 안 되나요?
 
브루넷: 다질 님은 한국사회 전반에 출산율이 급락하고 또래 여성 대부분 아이 낳을 생각이 없다는 것을 문제적으로 여기시더라고요.
 
소양: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브루넷: 꼴좋다, 한국사회 망해라 이렇게는 생각 안 된대요.
 
소양: 꼴좋다고 하기에는... 저 오늘 저기 있는 구포국수에 갔었거든요? 가게 귀엽더라고요. 맛은 평범하고. 다른 테이블에 여자아이를 데리고 온 젊은 여성 두 분이 계셨어요. 한국에서 애를 키우기 얼마나 힘들까 싶어요. 그것도 여성의 삶이잖아요. 지금도 힘들게 키우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거기 대고 꼴좋다고 할 수는 없죠. 지금 얼마나 힘들겠어요. 다방면으로 다 힘들 거예요. 사실 아이를 낳고 싶다, 안 낳고 싶다가 아니라 선택지가 없다고 생각해요.
 
브루넷: 한국전쟁 후에 초토화되고 가난하던 때도 애는 낳았는데 요즘은 삶의 기준이 높아진 걸까요?
 
소양: 저희 세대 여성들은 다 성장기에 불행했을 거란 말이에요.
 
브루넷: 한국의 모든 세대가 불행했죠.
 
소양: 이 불행함은 어떤 특수한 불행함이라기보다... 다들 정말, 저는 십대 때부터 친구들이랑 그런 얘기 했거든요. 꼭 페미니스트 아니라도 그냥 평범한 여자애들도 그런 얘기 잘 했어요. 나는 정말 내 아이에게 겪게 하고 싶지 않아. 입시도 그렇고 입시에 갇혀서 십대 때 다른 거 못 하는 것도. 물질적으로 풍요로워도 불행하게 살잖아요.
 
브루넷: 하지만 피상적으로 보자면 가장 행복한 유년기를 보낸 세대라고도 할 수 있거든요. 옛날에는 입시경쟁도 더 심했고 그 와중에 교사폭력, 가정폭력 극심했고. 대외적으로는 박정희, 전두환 있던 시대에서 그나마 완화된 형태로 갔는데 -그렇다고 지금이 그때보다 더 살기 좋단 말은 아녜요- 출산율이 이렇게 떨어졌다는 것은.
 
소양: 내가 아이인 입장에서도 안 행복하고 내 부모님도 안 행복해 보이는데 아이를 어떻게 낳겠어요. 다른 삶의 모델들이 늘어나서 그런 걸 수도요.
 
브루넷: SNS로 타인의 삶과 비교해서 그렇다는 말도 있던데 SNS는 전 세계가 다 하잖아요.
 
소양: 한국이 SNS를 제일 열심히 하나? 하하. 한 가지로 말하기 어렵겠죠. 한국남성들의 인식이 후진 것도 맞고.
 
브루넷: 한국남성이 유달리 매력 없는 종인가요?
 
소양: 매력 없는 건 모르겠어요. 매력은 없어도 되는데 그렇다고 생활에 도움이 되지도 않잖아요. 괜찮아 보이는 남자들조차 자기 아이를 돌볼 줄 모르고.
 
브루넷: 오십 씨 얘기도 해주실 수 있나요?
 
소양: 무슨 얘기부터 할지 모르겠어요.
 
브루넷: 어떻게 만나셨죠?
 
소양: 고등학교 동문회에서 만났어요. 학교 다닐 때도 한 번 봤어요. 선배와의 만남 그런 자리에서 만났어요. 그때도 인상적이었죠.
 
브루넷: 안경선배였나 보구나.
 
소양: 안경선배요?
 
브루넷: 여자후배들한테 호감을 사는.
 
소양: 아뇨. 그렇지는 않았어요. 그냥 제가 더 크게 받아들인 거죠. 제가 굉장히 존경하는 선생님의 굉장히 사랑하는 제자이고 그 사람이 고등학생 때 쓴 소설도 읽어 봤고 그런 것들이 하나하나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겼어요.
 
브루넷: 소양 님 취향에 맞으셨군요.
 
소양: .
 
브루넷: 예전에 본인은 일반적인 취향은 아닌 것 같다고 하셨어요. 마이너라고.
 
소양: 하하. 맞아요.
 
브루넷: 저는 안똔체홉 극장에서 연극 볼 때 오십 씨 몇 번 뵀는데 만날수록 인상이 짙어지면서 호감이 생겨요.
 
소양: 괜찮아요. 제가 봤을 땐.
 
브루넷: 오십 씨와 같이 오셨던 친구들이 같이 책모임도 하는 친구들이신 거죠? 모여서 단테 신곡읽는 한국남성들을 저는 처음 봤어요.
 
소양: 전공자들이니까. 일단 한국에서 러시아 문학 전공하는 남자들이라는 게-
 
브루넷: 한 줌이죠.
 
소양: 오늘 드디어 졸업하고 석사된다고 자기를 석사 오십이라고 불러 달래요. 기분 좋아가지고. 그런데 오십 대학 졸업식에는 가지도 않았어요. 그날 저희가 다퉜어요. 제가 심하게 했어요. 그래서 둘 다 졸업식에 안 갔어요. 그때는 졸업이 큰 의미가 아니고 가봤자 어차피 친구도 없으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기분 좋게 졸업하는 것 같아요. 논문을 끝내서 기쁜가 봐요. , 저는 오십을 실제로 만나보기 전에도 이 사람과 나는 언젠가 중요한 관계를 맺게 된다, 좋은 관계를 맺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어요. 이런 것도 야망이죠. 제가 어릴 때는 야망이 많았어요. 어떤 식의 사람이 되고 어떤 식으로 살 거야.
 
브루넷: 인맥으로 생각하신 거예요?
 
소양: 꼭 인맥이라서가 아니라 이 사람한테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실제로 봤을 때도 좋은 느낌이었고 유쾌하고 진지한 사람 같았어요. 처음 만났을 때는 긴장했어요. 그때 저는 여자친구도 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잘하려고 노력 했어요.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오죽하면 그때 같이 있었던 친구들이 너 오십 선배한테 작업 거는 거냐고 물었을 정도로요. 저는 깜짝 놀랐죠. 무슨 소리야. 나는 여자친구가 있잖아. 맞다, 맞다. 후퇴. 이런 느낌이었어요. 잘 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어 있었죠. 서로 호감이 있었고.
 
브루넷: 악조건이라 볼 수도 있죠. 소양 님은 연애 중이셨으니까.
 
소양: 정말 좋은 관계를 형성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여자하고 연애한 경험밖에 없었어요. 어떤 남자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 했어요. 내가 여자한테 먹힐 수 있다는 것은 이제 알겠어. 여자와 연애해봤으니까. 그런데 내가 남자한테 어떻게 보이는지는 몰랐죠. 그래서 긴장한 것도 있어요. 남자들과 한 번도 친구가 되어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하지? 선후배 관계지만 소중한 친구관계였던 거예요. 문학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 처음으로 형성한 남자인 친구. 그런데 말도 통하고 괜찮은 것 같아. 오십이 나중에 말하기로는 첫눈에 저한테 반했대요. 좋은 느낌을 받았고 이 후배가 마음에 들었는데 연애를 한대. 어쩌면 레즈비언인지도 모르겠어. 그래서 친구들한테 마음에 드는 아가씨-이상한 말이죠-가 있는데 레즈비언인 것 같아. 이렇게 얘기했다는 거예요. 나중에 오십 친구 앞에서 그게 아니라 저는 양성애자였다고 말했던 이상한 경험도 있어요.
 
브루넷: 자신이 양성애자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소양: 남자를 좋아해 본 적 있으니까요. 그리고 남자를 좋아해요. 좋아할 수 있는 남자가 이 사회에서 희귀한 것뿐이지 좋아할 기회만 오면 남자도 좋아해요. 하지만 이 한국 사회가 좀처럼 남자 좋아할 기회를 안 주죠.
 
브루넷: 오십과는 언제 연인관계로 발전했어요?
 
소양: 가까웠어요. 저희 둘의 학교가 걸어서 15분 거리였는데 선배가 와서 연극 보러 가자, 음악 들으러 가자 하면 안 할 이유가 없는 거죠. 물리적 거리도 가깝고 이 사람의 취향이나 나한테 제안해주는 것들이 너무 궁금한 상태에서 안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사실 만나기 전부터 나는 이 사람과 사랑에 빠진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걸 연애로 갖고 가고 싶지는 않았던 거죠. 그렇지만 저도 반했고 사랑에 빠졌어요. 전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사실 저는 그때 약간 이제 연애 지겨워 상태가 돼가지고 데이팅 어플 깔아서 남자 만날까 하고 있었어요.
 
브루넷: 데이팅 어플 써보셨어요?
 
소양: . 써봤어요.
 
브루넷: 일본만 해도 데이팅 어플로 많이들 만난다는데 한국은 남자 유저가 압도적으로 많고 여자들은 잘 안 쓰는 것 같아요.
 
소양: 제 주변에서는 여자들도 쓰는데 거기서 만나는 남자들과 잘 될 가능성이 별로 없죠.
 
브루넷: 장기적으로 잘 되는 거 말고 일회성 원나잇이라도 잘 되면 좋겠어요.
 
소양: 이상한 사람 많아요. 거기서 잘 팔리는 애들은 자기가 잘 먹힌다는 것을 아는 남자의 재수 없음이 있어요. 그리고 어쨌든 그렇게 만나고 나면 호감이 생길 수 있는데 괜찮은 남자가 하나 있으면 그 남자와 만나는 열한 명의 여자가 얘한테 호감이 있어요.
 
브루넷: 여자도 진지한 일대일 관계를 무거워할 수 있고, 가볍게 섹스파트너로 지내는 것도 좋잖아요. 안전 보장만 된다면.
 
소양: 진짜 그런 생각으로 데이팅 어플을 쓰면 상관없는데 보통 그런 이유로 데이팅 어플 쓰는 여자가 잘 없는 것 같아요. 산뜻하게가 안 되는 거죠.
 
브루넷: 음악 하는 남자와 사귀면 너와 사귄 걸 노래로 쓸 것이고 문창과 남자를 사귀면 소설을 쓸 거라는 식의, 예술 하는 남자에 대한 조롱과 경멸이 많은데요.
 
소양: 그럴 만하죠.
 
브루넷: 그렇지만 문학 전공하는 남자와 7년을 사귄 입장에서는?
 
소양: 지인이 예술 하는 남자를 만나고 싶다며 주변에 혹시 없냐길래 미안한데 진짜 없는 것 같다고 했어요.
 
브루넷: 전 인터넷 소문들이 과장됐다고 생각해요.
 
소양: 과장됐죠. 다들 인간이에요. 그들도 인간이죠. 하지만 후진 예술남도 많이 봐가지고.
 
브루넷: 후진 인간이 세상에 많을 뿐이죠.
 
소양: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예술 하는 남자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고 좀 사람 같은 남자를 만나야 되지 않나 싶어요.
 
브루넷: 예술 하는 남자에 대한 밈들은 예술가연하는 허세 때문일 것 같은데, 허세 없어요?
 
소양: 오십이요? 허세는 있지만 누구에게 통하는 허세일까? 오십의 가장 친구는 저와 아가멤논(고양이)이거든요.
 
브루넷: 단테 신곡모임 열 정도면 친구 없는 게 아닌데요.
 
소양: 하자고 하면 해주는 대학원 동료들이 착한 거죠. 그리고 문학 전공하는 분들이라 읽어 두면 자기들도 도움이 돼요. 그러니까 한 거죠. 하지만 가까운 친구는 정말 없어요. 어느 정도냐면 저를 통해서 다질과 대화하고 싶어 할 정도예요. 오십이 시 번역하고 나면 항상 제가 읽어 봐주길 바라요. 그런데 페드르에 대한 시야. , 이건 다질이 좋아하겠다. 다질한테 보여줘도 될까? 그러라고. 보여주면 다질이 음, 괜찮네 하죠. 그러고 나면 저한테 여섯 번 정도 물어요. 다질이 뭐래? 어땠대? 번역이 어떻대? 그리고 삼십 분쯤 있다가 번역을 미세하게 고치고 그걸 보여주래요. 티도 안 나는데 고쳤대. 알겠어. 다시 보내. 그리고 다음날 되면 또 최종본이라면서 고쳤대. 알겠어. 다질 씨가 뭐래? 뭘 뭐래. 아직 확인도 안 했지. 이럴 정도로 말이 통하는 사람과의 대화에 굶주려 있어요. 그런 사람이 허세가 있어봤자 누구한테 통하겠어요.
 
브루넷: 그렇네요. 고양이 붙잡고 그래봤자.
 
소양: 고양이 붙잡고 그러거나 주로 저를 붙잡고 그러죠.
 
브루넷: 소양 님도 그때 신곡읽었어요?
 
소양: 저는 다 못 읽었어요. 참여하긴 했어요. 깍두기처럼.
 
브루넷: 장 보고 재고 관리하고 요리하고 음식물 쓰레기 버리고 하는 게 힘들지 않아요?
 
소양: 자기 살림 하면 누구나 겪는 스트레스겠죠. 그런데 청결, 청소, 가사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르니까요. 어떤 사람은 식사 후에 바로 설거지 안 하면 스트레스 받지만 저는 하루쯤 내버려둬도 괜찮아요. 갑갑한 사람이 하는 거지. 아직은 그 정도로 생각해서 그다지 뭐.
 
브루넷: 장은 어디서 봐요?
 
소양: 집에서 가까운 마트에서 봐요. 동네에 이마트도 있어서 가끔 가는데 이제 불매하기로 했어요. 경영진이 이상해요.
 
브루넷: 극우 같아서.
 
소양: . 상품권 생기면 가긴 하지만 홈플러스 익스프레스라든가 더 가까운 데를 가요.
 
브루넷: 추천할 만한 주방용품 있을까요?
 
소양: 저는 아니고 같이 사는 사람이 스텐 좋아해서 모든 걸 다 스텐으로 써요. 저는 스텐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아요.
 
브루넷: 도자기가 좋아요?
 
소양: 저는 도자기가 더 좋아요. 그런데 스텐과 같이 쓰다가는 남아나지 않겠더라고요. 저는 물도 도기에 마시는 게 제일 좋거든요. 유리는 잘 깨지는 것 같고 스테인리스는 맛을 좀 변하게 하잖아요.
 
브루넷: 쇠 냄새가 나죠.
 
소양: 오십은 고집이 있어서 커다란 스테인리스 텀블러에 담아 하루 종일 마셔요.
 
브루넷: 목기도 의외로 괜찮아요. 가벼우면서 닿는 느낌이 쇠나 도자기와 달리 따뜻해요.
 
소양: 식기는 같이 사는 사람한테 맞추는 편이에요. 안 그러면 제가 다 관리해야 하는데 그러기도 싫고. 그거 깨지는 거니까 조심해 그러기도 싫고. 쓸 수만 있으면 되지 뭐. 그런데 최근 스테인리스 팬에 두부 구울 일이 있었는데.
 
브루넷: 까다롭죠?
 
소양: 스텐 팬에 계란은 부칠 수 있거든요. 두부는 심하게 들러붙더라고요. 그냥 에어프라이어에 돌려 버렸어요. 오십이 밥솥도 스테인리스를 어디서 찾아내 가지고.
 
브루넷: 스테인리스 내솥이요? 그거 희귀템인데.
 
소양: 그걸 굳이 찾아왔어요.
 
브루넷: 오래 쓰긴 해요. 코팅내솥은 몇 년마다 교체해줘야 하지만 스텐내솥은 계속 써요.
 
소양: 밥솥은 오십 담당이에요. 저는 손도 안 대요. 그 안에 들어가는 곡식도요. 최근 어떤 의사 선생님이 건강식 말한 트윗 보셨어요? 그거 보고 꽂혀서 mct 오일도 사다 놨어요.
 
브루넷: 하하하.
 
소양: 원래도 현미밥 먹거든요.
 
브루넷: 현미 불리는 게 번거롭지 않아요?
 
소양: 몰라요. 제가 밥을 안 해서 하나도 몰라요. 원래도 현미를 먹는데 거기다 렌틸콩, 귀리... 렌틸콩에도 종류가 있더라고요? 덜 깎은 렌틸콩을 사고 오곡현미도 올 거래요. 자기 쪼가 있어요. 그런 건 그냥 제가 다 맞춰줘요. 제가 굳이 반대할 이유도 없고요. 그냥 내버려두면 자기가 다 하니까 편하죠.
 
브루넷: 부모님과 살 때는 청소, 가사, 세탁을 의탁할 수 있잖아요.
 
소양: 완전히 부모님이 해주셨죠.
 
브루넷: 독립생활에서는 내가 안 움직이면- 물론 동거인이 있지만 좀 피곤하지 않아요?
 
소양: 저는 부족한 상태로 살아요. 깔끔하게 자기 살림 잘 관리하는 친구도 있지만 저는 그런 편이 못 되고 그렇지 않은 여자들도 있어요.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내버려두는 것도 여성인권 신장에 도움이 될 거예요. 거기에 대해 너무 스트레스 받을 건 아닌 것 같아요. 물론 할 수 있는 여건이 되면 하면 좋겠지만요. 주거환경이 나아지면 잘해보고 싶은데 지금은 그럴 때는 아닌 것 같아요. 불가능한 조건 같아서 포기했어요. 깔끔... 청소나 하면 다행이지. 뭘 살림에 대해. 돈도 못 버는데 살림살이를 어떻게 다 장만하겠어요. 그런 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냥 부족하고 더러운 상태로 살죠. 지저분하고 꼬질꼬질하게 살아요.
 
 
4. 페미니스트 호기심
 
브루넷: 지금 사는 동네를 좋아하시죠?
 
소양: . 동네 빵집도 좋아하고 동네 책방도 좋아하고 산책도 정말 좋아해요.
 
브루넷: 동네 절에 요새도 가세요?
 
소양: 이제 끝났죠. 스님이 작년에 떠나셨기 때문에. 그래도 산책은 가요. 그저께 갔는데 절이 완전히 바뀌었더라고요. 안주인(스님한테 이상한 표현이긴 하지만)이 바뀌니까 절도 바뀌는구나.
 
브루넷: 스님들도 바뀌어요?
 
소양: 스님들이 제가 알기로는 항상 이동해요. 한 곳에서만 머무는 건 드물고 수행자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절이랑 일종의 계약을 하는 거예요.
 
브루넷: 신부님들 로테이션 하듯이요?
 
소양: 그런 거예요. 동네 신도들은 계속 그 절에 다닐 수도 있는데 스님들은 바뀌는 것 같아요. 그래서 멀리서부터 스님 따라 찾아오는 신도도 있어요.
 
브루넷: 스님이 바뀌면 절의 분위기도 달라지죠.
 
소양: . 갔더니 향이랑 사찰음식 브랜드에서 나온 국수 팔더라고요. 전에는 그런 거 하나도 없었는데. 그리고 불도 다 꺼져 있고.
 
브루넷: 불교도 기본적으로 여성혐오를 깔고 가잖아요. 페미니스트로서 어떻게 견디세요?
 
소양: 저는 뭘 하겠다고 생각하면, 어떤 사람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고, 거기서 굳이 저를 다 드러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참여관찰 하러 간 것이기 때문에 저를 드러낼 필요가 없었어요.
 
브루넷: 수업이나 논문을 염두에 두고 가셨던 거예요?
 
소양: 아뇨. 그냥 개인적인 참여관찰이죠.
 
브루넷: 기본적으로 호기심이 있으시구나.
 
소양: , 그런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보려면 싸우면 안 되잖아요. 싸울 필요도 없고요.
 
브루넷: 소양 님은 대학 때 페미니스트로 활동하셨죠?
 
소양: .
 
브루넷: 활동하다 상처 받는 경우도 많더라고요.
 
소양: 받죠, 상처는.
 
브루넷: 소양 님은 그때를 뜨겁고 임파워링되는 시간으로 기억하는 게 남다른 것 같아요.
 
소양: 힘든 것도 많았죠. 그런데 그건 자기 가치관과 삶의 태도 문제 같아요.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저는 걸고 싶은 어떤 것을 발견하면 거기에 거는 사람인 거죠. 문학을 했던 것도 그래요. 보통은 문학을 좋아하고 책을 좋아하고 말잖아요. 저는 학교를 찾아내서 예고를 가고 대학 문창과를 가고 공부할 생각을 한 거죠. 페미니즘도 그렇죠.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의식화하고 끝내는 사람도 있는데 저는 정말로 거기 깊이 관여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연애도 그렇죠. 가볍게 만나도 되는데 계속 만나요. 그런 성격인가 봐요.
 
브루넷: 그때 활동했던 사람들과 계속 만나요?
 
소양: 제 가장 친한 친구들은 거의 그때 친구들이에요. 여성학 동아리 친구들. 대학 들어갔을 때 원래는 학부생들이 할 수 있는 여성학 복수전공 과정이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학교에서 그걸 없앴어요. 학생들과 상의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그 과정을 폐지했어요. 거기에 대해 항의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동아리를 만들었어요. 학교에서 여성학 과정을 폐지하다니. 여대에 어떻게 여성학이 없을 수 있어. 심지어 그 표면적인 이유가 이제는 양성평등이 됐기 때문에라니. 전혀 납득할 수 없었죠. 2015. 사람들이 옹달샘의 여성혐오를 고발하고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선언을 할 때였는데 충분히 양성평등이 이뤄져서 폐지한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죠. 학교는 그 과정을 없앴지만 거기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우리는 동아리를 한다. 여성학 과정이 없어도 여성학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만들었고, 학교 졸업한 지 오래 됐지만 그 후로도 계속 활동하고 있어요. 활동한다고 해서 엄청 운동적인 동아리는 아니에요. 전형적인 운동 동아리도 있잖아요. 조직화되어 있다든가 사람들이 운동이라고 하는 방식으로 집회를 주도한다든가. 저희는 그렇지는 않지만 학교 안에서 페미니즘을 얘기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목적에서 지금도 계속 친구들과 만나요.
 
브루넷: 학생회와 연합활동도 했나요?
 
소양: 여대 학생회이다 보니까 학교 안에서 A교수에 대한 미투 고발이 있으면 학생회에서도 관련 활동을 했어요. 그러면 같이 하고. 학교축제 때 인권주간을 어떻게 꾸릴 것인지도 함께 얘기했죠.
 
브루넷: 트랜스젠더 입학을 학내 페미니스트들이 반대해서 무산시킨 학교 있잖아요. 어디였죠?
 
소양: 숙명여대.
 
브루넷: 지금 들어오는 후배 페미니스트 중에 그런 논조를 가진 래디컬 페미니스트도 있어요?
 
소양: 그런 논조를 가진 분들은 저희 동아리에 안 들어오죠. 대학생들 게시판에 저희 동아리가 쓰까 동아리라는 얘기가 돌았어요(쓰까: ‘섞다를 동남방언으로 강하게 발음한 것. 교차 페미니즘을 비하할 때 쓰이는 단어). 거기는 트랜스젠더를 옹호한다고. 저희가 동아리 포스터 만들 때 트랜스젠더 추모집회에 갔던 걸 쓴 적이 있어요. 동아리 소개에도 그런 걸 적기 때문에 이게 싫은 사람은 안 들어오죠.
 
브루넷: 페미니즘 동아리에서 트랜스젠더를 지지하는 건 당연한 귀결 같은데 그게 페미니즘의 색깔이 되고 하는 걸 어떻게 봐야할지... 저는 우경화된 페미니즘이라고 보거든요? 그분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시겠죠? 자신들을 정말 래디컬하다고 생각하겠죠?
 
소양: 그렇죠.
 
브루넷: 여성 분리주의 운동은 역사가 깊잖아요. 1960년대, 70년대 미국에서도 분리주의 페미니즘이 있었고요. 그렇게 래디컬하다고 볼 건 아닌 것 같은데.
 
소양: 래디컬이라고 할 때 각자 생각하는 의미가 다른 거죠.
 
브루넷: 지금은 남자와 연애 안 하고 결혼 안 하고 아이 안 낳는 걸 래디컬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결혼제도에 얹혀 가지 않겠다. 그런 페미니스트들 보면 어떤 생각 드세요?
 
소양: 복잡해요. 저는 페미니스트로서 부채감이 있어요. 숙명여대 트랜스젠더 입학 반대 운동에 대해서도 트랜스젠더도 당연히 여대 입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는 무엇을 했나? 그런데 저는 랟팸을 볼 때 저 사람들이 왜 저러는지 이해하고 싶은 입장이에요. 사람들이 랟팸을 비웃지만 어떤 활동들은 왜 그런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들의 기여도 분명 있고.
 
브루넷: 어떤 기여가 있을까요?
 
소양: 많이 있죠. 예를 들면 소라넷 폐지. 디지털 성폭력 운동도 그렇고요.
 
브루넷: 그래. 우리가 그걸 잊으면 안 되겠다.
 
소양: 트위터 공간에서는 진영 간 갈등이 증폭되는 것 같아요. 가령 논란이 되었던 □□ 씨 사건도 그래요. 어느 순간부터 그 사람을 지지하느냐 마느냐가 페미니스트의 진정성을 가르는 것처럼 되어버렸어요. 그런 게 피로해요. 그의 우스꽝스러움에 대해 많은 말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나요? 사람들이 피해자를 위해 목소리를 내달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 인물의 모든 면을 인신공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안 된 거죠. 전혀 회생의 여지가 없는 인물이 됐잖아요. 그런 일을 겪으면 누구든 실언을 계속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 고리를 끊었으면 좋겠어요. 트위터는 활자만 떠도는 공간이니까 트위터를 하다 보면, 불교식으로 얘기하면 구업을 짓는다는 게 뭔지 알 것 같아요. 말을 그만 던지면 안 되나? 말을 얹을수록 이런 사건은 꼬이는 거예요. 이 사건을 트위터 밖에 있는 사람한테 설명하려면 아마 하루 종일 걸릴 거예요. 그런데 하루 종일 설명하고 남는 게 뭐예요? 소리와 분노만 남겠죠. 아무 의미도 없는. 그런 거 좀 안 했으면 좋겠어요. 그거 말고 할 얘기 많지 않나요? 누가 트위터에서 이상한 소리 빽 지르면 반격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지만 하루 지나면 까먹고 아무것도 아닐 수 있잖아요. 모르겠어요. 저는 트위터에서의 논쟁이란 것에 질린 것 같아요. 저는 누가 저한테 이상하게 말 걸어도 아닌 것에 대해서만 얘기해요. 밑도 끝도 없이 너무 이상하면 대답을 안 하고요.
 
브루넷: 소양 님도 공격받은 적 있으세요?
 
소양: 가끔요. 랟팸 분들은 어떤 것에도 시비를 걸 수가 있기 때문에. 하지만 저는 그들을 비웃기 좋아하는 심리도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못된 사람을 욕하는 거지만 또 너무 못된 말로 욕하잖아요.
 
 
5. 글쓰기 수업
 
브루넷: 소양 님도 예전에 인터뷰어로서 인터뷰 하셨던 적 있으시죠. 어떤 인터뷰였어요?
 
소양: 대학원 첫 학기 때 여성 글쓰기 모임 하시는 분들의 경험을 들으려고 했었어요.
 
브루넷: 주변 분들을 인터뷰 하셨나요?
 
소양: 제 주변에서도 하고 주변의 주변에서도 모집하고 그랬어요. 인터넷으로 알음알음해보려고 했는데 그렇게는 잘 안 되더라고요.
 
브루넷: 여성 글쓰기 모임들은 어떻게 진행되던가요?
 
소양: 글쓰기 모임도 여러 형식이 있는데 그때 제가 인터뷰할 때는 선생님이 있고 프로그램이 있는 글쓰기 모임을 대상으로 했어요.
 
브루넷: 수강료 내는?
 
소양: . 그런 걸 염두에 뒀어요. 돈을 내고 글쓰기 수업을 수강하는 건 어떤 걸까? 그렇게 해서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욕구가 뭘까 굉장히 궁금했기 때문에.
 
브루넷: 필라테스나 PT 수업 받는 욕구와 비슷한 것 아닌가요?
 
소양: 그 안에서 생겨나는 관계들이 흥미로웠어요. 거기서 어떤 것이 형성되는지 궁금했어요.
 
브루넷: 내면을 공유하는 과정이라.
 
소양: . 정말 그렇잖아요. 그리고 그런 글방들이 기존에 없었던 게 아니잖아요. 어딘 님의 어딘글방부터 시작해서.
 
브루넷: 이슬아 작가님.
 
소양: . 이슬아 작가님의 선생님이신 어딘 님이 하셨던 글방이 모델이 된 것 같아요. 그런 글방이 열렸을 때 글방에 찾아가는 사람들은 누구고 거기서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어떤 관계들이 형성되고 어떤 것들이 공유되는가가 궁금했어요.
 
브루넷: 그런 글방에 소속된 분들을 만나셨어요?
 
소양: 처음에는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제가 그 안에 들어가 있지 않은 상태에서 그 분들을 섭외하기는 힘들더라고요. 알음알음 연락드렸지만 연락이 닿았던 분들도 외국에 가셨다든지 하는 여러 사정으로 인터뷰를 할 수가 없었고, 한 학기 동안 진행된 수업에서 마쳐야 하는 인터뷰여서 주변 친구들과 친구들의 친구들을 섭외해서 했어요. 그러다보니 제가 처음에 염두에 둔 글방과는 다른 식의 글쓰기 모임을 했던 분들도 섭외하게 됐어요.
 
브루넷: 문창과 합평회 모임 분들을 만나신 건가요?
 
소양: 글방은 기본적으로 문창과 합평회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등장한 곳들이라 할 수 있죠.
 
브루넷: 합평회에서는 쓰라린 말들이 오가기도 하죠?
 
소양: 그래서 규칙들이 중요한 거죠. 글방을 이끄는 글방지기-이런 말도 많이 쓰는 것 같아요-가 어떤 규칙을 가지고 오면 그 규칙에 맞춰 합평을 진행하는 대안적인 방식을 지향하는 곳들이 많았어요. 제가 인터뷰했던 분들은 글방 외에도 친구들과의 쓰기 모임이나 교지 편집부를 경험했던 분들이셨어요.
 
브루넷: 읽기 모임은 부담 없이 책만 가져오면 굴러가지만 쓰기 모임은 훨씬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활동을 필요로 하잖아요. 생업도 아닌데 어떤 주제로 마감 맞춰 꾸준히 글을 쓴다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소양: 저도 돈을 냈던 건 아니지만 자발적으로 모여서 일주일에 한 편씩 쓰는 모임을 해본 적이 있어요. 그런 것들이 시도는 많이 되잖아요. 그런데 지속되기가 어려워요. 사람들이 글을 안 쓸 뿐더러 글을 안 쓰니까 모임에 안 오기 시작해요. 읽기 모임도 해보고 글쓰기 모임도 해본 입장에서는 글쓰기 모임이 훨씬 더- 뭐라고 할까, 가시적으로 역동적인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읽기 모임은 음...
 
브루넷: 텍스트 뒤에 숨기 좋죠.
 
소양: . 좀 더 프렌들리한 느낌으로 가는데 글쓰기 모임은... 합평의 규칙들이 있는 이유는 서로 마음을 상하지 않기 위해 안전장치로 하는 건데 그만큼 자기 글을 보여주고 남의 글을 읽고 거기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는 게 사실은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그래서 그 안에서 좋다고 하면 굉장히 역동적으로 좋은 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그리고 그 안에 개인사들이 섞여 들어가는 경우에는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가 없는 거죠.
 
브루넷: 기분 상하는 일도 발생하나요?
 
소양: 글방에서 기분이 상한다기보다 인간관계가 만들어내는 역동 때문에 그런 문제들이 생기기도 하는 것 같아요. 모든 모임이 그렇긴 한데 이게 글쓰기 모임이기 때문에. 읽기 모임은 어쨌든 대상 텍스트가 있으면 그 힘으로 가잖아요. 텍스트의 힘에 기대고 있는데 글쓰기 모임은 거기 모여 있는 사람들이 쓰는 글이 텍스트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기대게 돼요.
 
브루넷: 어떤 구성원들이 모이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다르겠네요.
 
소양: . 그게 좌우를 해요. 최근에 이슬아 작가의 북토크에 다녀왔어요. 눈물에는 체력이 녹아있어: 포기하지 못할 꿈의 기록들』이라는 책을 출간하신 한유리라는 분이 계세요. 이 분은 반 디지털성폭력 활동하면서 글도 쓰시고 그 글을 엮어서 책을 내셨어요. 저는 그 분께 관심이 있어서 북토크에 가게 되었어요. 꼭 한유리 작가뿐 아니라 젊은 유망주들이 출판시장에 나오는데 저는 이런 분들이 해온 작업이 책 한 권에 묶여 나온다는 게 뭔가 부적절하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책 한 권으로 시장에서 이 사람을 포섭한다는 느낌이랄까요? 그 사람이 해온 어떤 것들을 그 책 한 권으로 판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럼 그 다음은 뭘까? 지속가능하지 않은 조건들이 있잖아요. 글쓰기를 지속가능하지 않게 만드는 어떤 조건들이 있고, 최소주의를 하든 뭘 어떻게 하든 간에 사실상 그게 가능한 사람들이 글을 쓰잖아요. 모객 할 수 있는 조건이 필요하잖아요. SNS 팔로워가 많다든가 말하자면 자신의 어떤 자원들을 이용해서 모객을 하는 건데 저는 그런 수익구조 자체가 취약하다고 생각해요. 작가가 갖고 있어야 하는 어떤 세일즈 파워로서 작가의 매력이 너무 많은 것을 차지하고 있고 그래서 SNS를 열심히 해야 되고 인스타그램, 트위터 열심히 해야 되고 그런 식으로 쌓아올린 유명세를 가지고 모객을 한다는 거죠. 모객이라는 게 꼭 매력을 판다 이런 게 아니라 그것 자체가 너무 취약한 구조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게 기대고 있는 것들이.
 
브루넷: 문창과 나오셨으니까 글쓰기도 충분히 가르칠 수 있는 기술이라고 생각하실 줄 알았어요. 일단 문창과는 그런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 아닌가요?
 
소양: 그렇지만 제가 예고에 처음 들어갔을 때 모든 선생님들이 그러셨어요. 글쓰기는 사실 가르칠 수 없는 것이지만 동료가 되기 위해 가르친다. 가르칠 순 없어도 기술적인 면에서 도움을 줄 수는 있죠. 글쓰기의 유용한 원칙들은 가르쳐줄 수 있어요. 첫 문장을 간결하게 어떻게 써라, 어떻게 구조화해라. 그런데 그런 것도 글을 쓰는 방법이라고 해야 할지... 글은 누가 어떻게 해줄 수 없고 그냥 자기가 써야 되는 거잖아요. 하지만 예고의 유용함도 있어요. 어쨌건 예고 문창과를 갔던 건 좋은 선택이었다. 왜냐면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에 들어갔으면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에. 사실 그것밖에 없는 것 같아요. 한국이 고등학생들한테 요구하는 게 너무 많잖아요.
 
브루넷: 많은 시간을 요구하죠.
 
소양: 예고도 엉망진창이지만 어쨌든 한국에서 고등학생한테 자유롭게 시간을 쓸 수 있게 허용하는 몇 안 되는 학교인 것 같아요. 그리고 어쨌든지 간에 자기가 해보고 싶었던 걸 한번은 해본다는 게 다르다고 생각해요.
 
브루넷: 맞아요. 예고, 예대 나와도 예술 전공 안 할 수 있거든요. 다른 길로 얼마든지 갈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시기가 무의미한 게 아닌 것 같아요.
 
소양: 잘 보낸 거죠. 재밌게 잘 보낸 거고 누구나 그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인프라를 필요로 하는 애들한테 다 주면 안 되나? 그런 생각 맨날 하죠. 좀 하게 해주면 안 되나?
 
 
6. 자기만의 방
 
브루넷: 예고 문창과에 가겠다는 생각은 어떻게 하셨어요? 미술과 음악, 연기 쪽은 옛날부터 예고들이 유명했지만 문창은 상대적으로 신생 학과인데요.
 
소양: 어릴 때는 외향적인 어린이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사를 많이 다녔어요. 제가 초등학교를 세 군데 나왔거든요. 그러면서 좀 내향적인 인간이 되었나 봐요. 음침해지고. 중학교 때가 인생에서 제일 울적했을 땐데 책은 어릴 때부터 좋아했고 언젠가 나도 그런 걸 써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 목표 의식이 강한 어린이였어요. 나는 나중에 뭘 해야지. 그런 생각을 항상 했어요.
 
브루넷: 작가를?
 
소양: . 그래서 조사를 한 거죠. 어떻게 될 수 있나. 그렇게 가게 됐어요. 그런 게 있다는 걸 제가 알아내서.
 
브루넷: 부모님 반대는 없었어요?
 
소양: 가정마다 사정이 다르긴 하겠지만 제 생각에는 애가 무언가 하고 싶다는 게 있다면 차라리 수월한 것 같아요.
 
브루넷: 맞아요.
 
소양: 그리고 저는 어릴 때 꽤 모범생이었기 때문에. 공부도 못하지 않았고.
 
브루넷: 그러면 오히려 공부로 밀어붙일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으셨네요.
 
소양: 저희 엄마아빠는 다 시켜주셨던 것 같아요. 제가 하고 싶어 하는 거 다 시켜주셨어요, 결국에는.
 
브루넷: 예고 학비가 저렴하지 않죠?
 
소양: 학비가 비싸죠. 대학교 등록금에는 못 미쳐도 거의 그 정도죠. 저는 지역에서 장학금이 나왔어요. 차상위계층으로 소득분위가 잡혔던 것 같고 그래서 지역에서 학비 절반을 줬어요. 그 장학금 덕분에 다녔어요. 그리고 큰아빠가 성공하신 분인데 저를 많이 지원해주셨어요. 과제를 열심히 하고 싶으니까 노트북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큰아빠가 사주셨어요. 입학금도 내주시고. 저는 학교를 거의 그렇게 다닌 것 같아요.
 
브루넷: 부모님과 큰 갈등 없이 성장기를 보내셨어요?
 
소양: . 저희 엄마는 기본적으로 갈등을 안 좋아해요. 그런데 제가 비판적인 어린이였던 거죠. 학교 마치고 엄마와 산책하면 좋은 얘기를 좀 해야 되는데 제가 맨날 이 세상은 썩었어, 이런 얘기나 하니까 엄마는 어린 애가 왜 이러나 좀 그러셨던 것 같아요.
 
브루넷: 하하.
 
소양: 제가 너무했던 것 같아요. 너무 비판적이었던 것 같아요. 그냥 속으로만 생각했으면 되는데 그걸 꼭 말로 해야 된다고 생각해가지고.
 
브루넷: 저한테 소양 님은 온화한 사람인데 그런 면도 있으셨네요?
 
소양: 우울했어요. 중학생 때 제일 우울했어요.
 
브루넷: 그래도 문창과도 혼자 알아보고. 예고 가려면 시험도 치잖아요.
 
소양: .
 
브루넷: 붙었을 때 기뻤겠어요.
 
소양: 정말 좋았죠. 대학 붙었을 때보다 그때가 더 좋았던 같아요.
 
브루넷: 예고 애들은 어땠어요?
 
소양: 전공 따라 다를 것 같긴 한데 예고는 기본적으로 앉아만 있어도 기가 빨리는 곳이죠. 다들 자아가 강했어요. 그런데 저는 모범생이었잖아요. 우등생은 아니고 그냥 그렇게 흠 잡을 데가 별로 없는 학생이었는데, 그런 게 학교에서는 보호막이 되는 것 같아요. 범생이라고 하면 별로 안 건드려요. 어떤 사람들은 학교도 학교생활도 너무 싫었다고 하는데 저는 그런 것 없이 다녔고, 있었다 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요.
 
브루넷: 문창과 학생들의 성비는 어때요?
 
소양: 여자가 압도적으로 많죠. 마흔 명 중에 남학생은 서너 명? 그 정도 비율인 것 같아요.
 
브루넷: 선생님 비율은?
 
소양: 선생님은 남자가 더 많을 수도 있어요.
 
브루넷: 수업은 괜찮았어요? 소양 님 때가 문단 내 성폭력 고발 시기와 겹치지 않나요?
 
소양: 제가 나온 예고에 B가 교사로 있었죠. 이상한 사람이었죠. 이상한 티가 났어요.
 
브루넷: 어떤 식으로요?
 
소양: 부적절한 언행이 줄줄 새죠. 제 기억에 그때 남자 작가들끼리 점심을 먹고 저희가 앉아 있는 벤치에 와서 잠깐 학생들이랑 농담 따먹기를 하고 갔어요. 그때 북한 미사일이 어쩌고 하는 이슈가 있었는데 갑자기 B가 저와 제 친구들한테 너희는 전쟁 나도 기쁨조 하면 되니까 괜찮겠다고 했어요. 그때는 그 말이 이해가 안 가서 웃었어요. 그 사람이 자리를 떠난 후에야 그 말뜻을 이해했어요. 저는 그 사람 수업 들었던 학생도 아니고 그 사람과 직접 대화 나눌 일도 없는 사이였는데 제가 그런 말을 들었을 정도면 일상적으로 엄청 샜을 거예요. 문창과라는 학과가 너희는 예술 하는 애들이니까 이 정도는 알아야 돼- 하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성에 대한 얘기 물론 할 수 있지만 이상하게 권장하는 분위기가 있었고, 남자선생들의 언행은 그런 식으로 새고 있었어요. 저는 그것 때문에 괴로웠어요. 어떤 남자선생 수업 들었을 때 그 사람이 이상한 말을 너무 많이 하는데 친구들은 그걸 이해를 못해요. 왜 이상한지 감지하지 못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자기가 술집 가서 놀았던 얘기를 해요. 이 새끼 여자 나오는 술집에 갔다는 느낌이 딱 들어요. 그런데 다른 애들은 무슨 뜻인지 모르니까 그냥 웃어요.
 
브루넷: 알았지만 괜찮다고 생각했을 수도요.
 
소양: 아니, 몰랐던 것 같아요. 제 생각에는 진짜 몰랐던 것 같고 진짜 존경을 했던 것 같아요. 저는 끊임없이 속으로 혼자 구토를 하고 있는 거죠. 어떻게 학생들 앞에서 여자 나오는 술집 가서 있었던 일을 얘기할까. 이상한 말, 이상한 상황이 너무 많았어요. 그래서 그때도 모두가 알고 있었어요. 저 사람은 문제 있는 인간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게 정도를 넘어섰던 거죠.
 
브루넷: 피해자들이 문제제기하기 전에는 학교뿐만 아니라 그 업계 내에서 용인되었던 언행이었을 거예요.
 
소양: 문창과 실기교사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학생들의 개인적인 일들을 세세하게 알게 돼요. 워낙 사람을 잘 읽는 사람들이니까 작가가 됐겠죠. 글을 쓰고 읽다 보면 사적인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많고요.
 
브루넷: 부적절하게 가까워지기 쉽겠어요.
 
소양: 저를 가르쳤던 어떤 선생은 저한테 너는 어리지만 경험도 있고 다 알잖아, 이런 식으로 얘기했어요. 어느 날은 실기 상담을 하는데 선생님과 학교 밖에 있는 식당에 갔어요. 지금 생각하면 이런 것도 다 이상해요. 고등학생이 왜 선생님과 밖에 나가서 밥을 먹으면서 상담을 해야 돼. 그냥 학교 안에서 하면 되는데. 식당에 데려가 밥을 먹으면서 자기가 옛날에 제자였던 여자애들과 만난다는 얘기를 했어요. 제자들이 졸업한 후에 만났다는 건지 졸업 전에 만날 수도 있다는 건지. 왜 이 이야기를 지금 나한테 하는지. 알 수는 없죠. 저를 조숙한 여자애로 생각하고 자기가 어떤 여자와 실수로 잤는데 그걸 다음날에 사과를 해야 하냐고 묻기도 했어요. 미쳤냐고. 사과하지 말라고 했어요. 하하. 이런 일들이 빈번했어요.
 
브루넷: 옛날에는 좋은 선생님으로 커버될 수 있었을 것 같아요. 지금 기준으로 보면 다 부적절하죠. 동성의 여자선생이라 해도 자기보다 어린 학생한테 성생활 상담을 한다는 건 문제인데 남자선생이 그런다? 소양 님은 젊은 사람인데도 구시대를 살았어요.
 
소양: 그럴 수도 있어요.
 
브루넷: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선언과 미투 고발 이후 어떤 기준들이 바뀐 것 같아요. 현실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지만 이게 문제라는 인식 자체는 생긴 것 같아요. 소양 님이 고등학교 다닐 때도 여성혐오라는 단어를 썼어요?
 
소양: 한국사회에서 여성혐오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한 게 2015년인데 제가 고등학교 처음 들어갔을 때 만난 선생님이 페미니스트였어요. 그 분이 저한테 그 말을 처음 알려주셨고 그 말이 엄청 유용했어요. 노르웨이 총기난사범 브레이빅 있잖아요. 그 기사를 출력해서 이런 게 여성혐오라고 알려줬어요.
 
브루넷: 브레이빅이 유럽도 한국처럼 돼야 한다고 주장한 놈이죠.
 
소양: . 그 선생님이 그런 얘기 해주고 여성혐오가 뭔지 가르쳐 주셨어요. 다음 해에 남자선생님을 만났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사람이 하는 게 여성혐오인 거예요. 이 사람 아무래도 여성혐오자 같아. 학생들한테 자기 엄마 얘기를 자꾸 하고 자기 엄마 때문에 여자를 못 믿게 됐다는 얘기를 하고. 남자선생들 정신머리가 그랬어요.
 
브루넷: 페미니스트 교사를 십대에 만난 건 운이 좋았네요.
 
소양: 처음에 페미니스트 선생님을 만나서 여성혐오라는 말도 배우고 이러니까 사실은 이상한 선생들 만나서 지지고 볶고 했던 게 거의 페미니스트 훈련이었던 거죠. 그렇지만 괴로웠어요. 반박을 충분히 할 수 없으니까. 그때는 반박을 완벽하게 하고 싶었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학생이 선생한테 반박을 다 하겠어요. 못하죠. 그건 언어가 없다는 문제도 아니고 그냥 못하는 위치에 있는 건데, 하여간 그때는 너무 이상한 말을 많이 들으니까 직접 반박은 못해도 머릿속으로 생각은 많이 했죠.
 
브루넷: 어떤 사람들은 이상하다는 걸 중년 넘어서 느끼기도 하는데 소양 님은 그때 즉각적으로 문제라고 느꼈잖아요. 명민하셨던 것 같아요. 페미니스트 선생님 만나기 전에도 버지니아 울프 읽고 그러셨나요?
 
소양: 아뇨. 울프도 그때 읽었죠.
 
브루넷: 저는 울프를 읽으려고 시도는 여러 번 했지만 다 실패했다가 이번 인터뷰 준비하면서 다시 읽었는데 이제야 울프를 만난 기분이 들어요. 울프를 이해하기 위해 내가 그동안 고전도 읽고 독서모임도 그토록 했던가-

소양: 알아야 하는 게 너무 많아. 하하.
 
브루넷: 울프가 굉장히 지적이잖아요. 언급하는 작품도 많고요.
 
소양: 맞아요. 그 문체에 진입하는 것도 힘들 수 있어요.
 
브루넷: 그리고 울프는 너무나 페미니스트죠. 가부장 체제에 젖어 살아온 여성독자로서는 거부감이 들 수 있는 내용도 많아요.
 
소양: 울프는 뭔가 아닌 것을 자처하잖아요. 저 케임브리지 남자애들. 쯧쯧. 나는 거기에 속하고 싶지도 않아. 그런 태도가 어떤 이들에게는 젠체한다고 느껴질 수도 있죠.
 
브루넷: 페미니즘을 접하고 난 뒤에 읽어도 어렵더라고요. 이런 대목 있잖아요. 가진 자원을 총동원해서 최대한 여행을 많이 가고 많이 즐기라는.
 
소양: 저 그 부분 되게 좋아해요.
 
브루넷: 저도 너무 좋지만 음.
 
소양: 반감도 들죠.
 
브루넷: , 빈정 상했던 적도 있어요. 그럴 돈 없는 여자는 어쩌라는 거지? 버지니아 울프 멋지지만 버지니아 울프는 하녀를 썼던 사람이야. 하녀를 두고 살았던 여자가 가정의 천사가 되지 말라고 하는 말을 전업주부인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하녀인 여자들은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돼? 이런 생각이 뭐냐면, 버지니아 울프와 대비해서 D. H. 로렌스 같은 작가를 추앙하는 태도거든요. ‘진정한노동자 (남성)작가와 비교해 울프는 계급적 한계를 지닌 작가라고 보는 거예요. 저도 그런 과정을 겪었어요. 버지니아 울프가 언급했던 여성작가들을 읽고 말과활아카데미에서 박경선 선생님의 여성주의 번역수업도 들으면서 내 안의 여성혐오를 어느 정도 인지한 후에야 버지니아 울프를 좋아할 수 있게 됐어요. 그런데 소양 님은 어쩜 그렇게 이른 나이에 울프를 좋아할 수 있었나요?
 
소양: 저는 울프가 얘기한 작가들을 좋아했어요. 제인 오스틴과 브론테 자매들에 대해 얘기하잖아요. 그리고 저의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저한테 글을 쓰는 여성이라면 반드시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어야 된다고 얘기해주셨어요.
 
브루넷: 자기만의 방에서 울프가 여성청중들한테 글을 쓰라고 격려하는데 마치 공산당선언처럼 선동적이더라고요.
 
소양: 맞아요. 엄청 선동적이에요.
 
브루넷: 셰익스피어의 누이 얘기를 하면서 그 여자는 죽었지만-
 
소양: 당신 속에 아직도 살아있다.
 
브루넷: 그 시인들은 죽지 않는다고. 그들은 우리 속으로 걸어 들어와 육체를 갖게 될 기회를 필요로 할 뿐이라는 대목을 읽는데 미칠 것 같더라고요.
 
소양: 그 부분 눈물 나죠.
 
브루넷: 내가 왜 이 감동을 처음엔 못 느꼈지? 이런 감동을 받으려면 문해력이 좀 필요한가?
 
소양: 자기만의 방부분 부분이 모두 좋고,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어요.
 
브루넷: “16세기에 시적 재능을 타고 난 여성은 스스로에 대한 투쟁을 벌여야 하는 불행한 여성이었을 겁니다.”라면서 4장에서 윈칠시 부인 얘기를 하잖아요. 윈칠시는 너무나 시인이고 너무나 똑똑한 여성이죠. 세상이 여성을 차별한다는 것도 그 시대에 이미 다 알았던. 하지만-
 
소양: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브루넷: 시인으로 살 수가 없는. 그래서 너무 고통스럽고 불행한 여자. 그런데 나는 21세기 여성이고 지금은 여성 문학장이 있는데도 왜 이런 이야기가 다가올까요? 버지니아 울프가 살았던 시대보다 지금은 백 년 정도 더 지났으니까 버지니아 울프보다도 여자들이 글 쓰기 좋은 세상이잖아요. 여성작가들이 상도 많이 받고 여성 전업작가도 늘었고요. 여성의 글쓰기에 대한 소양 님 생각을 여쭈려던 건데 질문이 장황해졌네요.
 
소양: 개념적으로 여성적 글쓰기를 하겠다고 하든지 아니든지 간에 여성들의 글쓰기는 굉장히 특수한 거라고 여겨지죠.
 
브루넷: 아직도 그럴까요? 아직도?
 
소양: 저는 고등학교 때 문학을 하기 전까지는 여자라는 자의식이 없었는데 문학을 하면서부터 아, 나는 여자애구나, 라는 걸 알았던 것 같아요. 그전에도 이성애 규범-이 말은 사후적으로 떠올린 것이지만요-에 내가 좀 안 맞는다는 생각은 했지만요.
 
브루넷: 이성애 규범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나요?
 
소양: 나는 한국사회에서 말하는 여자애가 아닌 것 같다는 거죠. 거기 미달하거나 하여튼 적절하게 존재하지 못하는 느낌 있잖아요. 여자애들은 몸이 작았으면 좋겠고 그런 것들이요.
 
브루넷: 한국에서 여성성은 타자화되고 왜곡돼 있어서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렇게 느낄 걸요.
 
소양: 맞출 수가 없죠.
 
브루넷: 그게 이성애 규범이라면 한국여성 대부분이 안 맞는다고 느낄 거예요.
 
소양: 저는 그걸 민감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제가 모범생이었단 말예요? 모범생으로는 존재할 수 있었는데 여자애로는 어떻게 존재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브루넷: 바람직한 여자아이로.
 
소양: . 그게 어려웠던 것 같아요.
 
브루넷: 한국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상과 충돌하지 않는 한국여자가 있을까요?
 
소양: 있죠. 어떤 여자들은 그걸 잘 수행하잖아요.
 
브루넷: 성형이나 다이어트에 매달리는 것도 그런 여성상과 불일치하는 데 대한 반응 아녜요?
 
소양: 그렇죠. 하여간 저는 그때 왜 그렇게 울적했는지 생각해보면 그랬던 것 같아요. 사실은 내가 여자라는 게 곤란할 때만 여자라고 느끼는 거죠. 문학을 한다고 예고에 갔는데 내가 여자라서 곤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여성작가들 좋아하나 봐. 그런데 그런 건 항상 특수한 걸로 분류가 되네. 예를 들어, 세계문학전집의 여성작가 비율을 보면 말예요. 저는 되게 모범생이기 때문에- 문예창작과도 모범생이라서 진학을 한 거예요. 작가는 어떻게 되나? 어떻게 할 수 있지? 그게 궁금해서 해결하려고 간 거죠. 어떤 모델을 찾았던 거죠. 어떻게 해야 되지? 그런데 그런 모델이 잘... 모르겠다? 제 주변에 문학을 하는 여성들을 만나 봐도, 제가 봤을 때 저 사람은 너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여자들도 자기들은 모델이 없다는 얘기를 많이 해요. 모델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모델이라기보다 뭔가 같이 이뤄나가야 할 느낌이 여전히 드는 거죠. 뭐를 문학이라고 하는지는 사람마다 차이가 크겠지만 제가 문창과에 들어가 배웠던 것들은 내가 여자애라서 곤란하다는 걸 상기시켰어요. 물론 이 특수한 걸 잘 벼려서 좋은 걸로 만들어내면 상찬 받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여자란 것에 대해 의식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남성작가들이 내가 진짜 기깔 나는 프로필 하나 뽑아야 하는데’, 이런 생각 많이 할까요? 엔간히 어느 정도 멋있으면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여자작가들이 프로필 사진 찍는다고 생각하면-
 
브루넷: 실물보다 현격히 아름다운 프로필 사진을 찍어서 오랫동안 잘 사용하신 에쿠니 가오리가 떠오르네요.
 
소양: . 그것부터 너무 중요하잖아요. 그런 게 다 문제 아닐까요? 한유리 작가 북토크에서 나온 얘기인데, 그 글방 작가들 중에서 아름다운 프로필 사진을 갖지 않은 작가가 없어요. 그런 게 너무 중요한 거죠. 아직도.
 
브루넷: 래디컬 페미니즘을 말하는 여성 지식인도 매체에 출연할 때는 외모를 가다듬고 나오더라고요. 탈 코르셋을 주장하는 페미니스트조차도.
 
소양: 탈 코르셋 논의는 계속해서 여자들 외모에 대해 말하게 만든다는 게 문제 같아요. 저는 탈 코르셋 운동이 일본 구투(#Kutoo)운동처럼 여성노동자한테 굽 높은 구두 신기지 말라는 식으로 노동시장에서의 조건에 대해 가야한다고 생각해요. 안 그러면 계속 여자들이 진짜 탈코는 뭐지? 라고 반문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젊은 페미니스트들이 자기는 속탈코하겠다, 마음속에서부터 이 기준을 벗어던지겠다고 하는 시도는 고무적이지만 사실 불가능하죠. 왜냐면 그런 기준은 우리 안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세상에 다 있는데 그걸 자기 의지만으로 극복한다는 것은... 제정신으로 버틸 수가 없죠.
 
브루넷: CGV가 여성 직원들한테 빨간 립스틱 바르도록 강제하는 걸 거부한다거나.
 
소양: , 그런 식으로 가야지, 끊임없이 저 여자는 어떻고 나는 어떻고 따지는 것은 기존의 여자 외모품평과 다를 바 없는 것 같아요.
 
브루넷: 저는 글쓰기가 어렵다는 건 알겠는데 내가 여자애라서 글쓰기가 곤란하다는 건 잘 이해가 안 가요.
 
소양: 그건 제가 특수하게 겪은 문제일 수도 있어요. 제 친구들은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예를 들어 ○○○, △△△ 작가 같은 여성작가들은 페미니스트 작가라는 의식이 있어도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내가 여자인 부분 때문에 글쓰기가 힘들다고 생각 안 할 것 같아요. 그런데 자기가 갖고 있는 주제가 그거라면 어떡하지? 저는 그랬던 거예요.
 
브루넷: 그걸 밀고 나가서, 가령 사소설로 분류되곤 하는 글을 쓰고 싶지는 않았어요?
 
소양: 이중 기준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걸 굉장히 잘하고 싶었던 한편으로 저를 가르쳐준 페미니스트 선생님조차도 그런 걸 잘하면 좋다고 얘기하면서도 항상 그걸 평가절하 하셨어요. 여자애들이 그런 걸 쓰는 건 자기가 얼마나 대담한지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다, 그래서 여자애들이 남자애들보다 그런 걸 더 잘 쓰려고 한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게 있었어요. 그런 시선도 의식이 됐고 당시 여건상 다른 식으로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모범생답게 이론을 공부하기 시작한 거죠. 그때는 여성학 공부를 하면 내 글쓰기도 수월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이론이 설명을 해주긴 하는데 해결은 못해줘요. 해결은 영원히 안 되죠.
 
브루넷: 페미니즘을 배우면 외모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외모 집착이 없어지는 건 아니듯이.
 
소양: .
 
브루넷: 하지만 공부를 하셨다.
 
소양: 열심히 했죠. 그 후로 계속 십 년 동안 했죠.
 
브루넷: 예고 문창과에서 끝나지 않고 대학도 문창과로 가셨어요.
 
소양: 입시 결과에 따라서 간 거지, 가고 싶어서 간 것은 아니었어요. 저는 철학과를 가고 싶었어요. 그것도 저의 이 이슈와 같은 맥락인데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의 차이에 대해 엄청난 갈등이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울프도 사실- 울프가 해결 못해준 게 그거였던 거죠. 자기만의 방에서 울프가 그러잖아요. 샬롯 브론테가 분노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소설가로서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고요. 여성작가들도 이렇게 얘길 한다니까요. 너무 혼란스러웠어요. 어떻게 해야 된다는 거지? 분개하는 대신 이걸 어떻게 하라는 거지? 그러면 공부를 하자. 이렇게 된 거에요. 제 해결방식은 그런 거였고 그런 게 항상 있었어요. 철학은 보편적인 것을 다룰 거라고 생각했어요.
 
브루넷: 철학도 엄청나게 여성혐오적인 세계던데요.
 
소양: 그때는 그런 건 잘 모르겠고 하여튼 철학과에 가고 싶었는데 제가 그동안 해왔던 걸로만 대학을 가야했기 때문에 문창과를 가게 됐죠.
 
브루넷: 높은 경쟁률을 뚫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소양: 추가합격 1번으로 붙었어요. 경쟁률은 있었겠죠.
 
브루넷: 대학 가서는 등단을 시도하기보다는 다른 공부를 하셨고요.
 
소양: 친구들이 소양은 자유전공이라고 얘기할 정도로 문창과 수업은 최소한으로 듣고 정말 듣고 싶은 것만 들었어요.
 
브루넷: 등단 생각은 없으셨어요?
 
소양: 그런 제도에 가깝게 노출되다 보니 환멸이 컸던 것 같아요. 저는 백일장 키드였잖아요. 훌륭한 백일장 키드는 아니었어요. 모범생이지만 그런 모범생은 되지 못했어요. 문창과에서 모범적으로 한다는 것은 백일장을 휩쓸고 다니면서 대학 갈 실적도 쌓고 상금도 타는 거예요. 그렇게 수완이 좋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저는 그런 식으로 하지는 못했어요. 저는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근본주의자인 거죠. 기준이 바깥에 있는 글은 쓰고 싶지 않았어요. 그렇긴 했지만 어쨌든 결국에는 그 형식에 따라서 쓴 글로 상을 받아서 대학을 가긴 했어요. 그 외에는 지방 백일장 가면 놀았어요. 고등학생이 할 수 있는 일종의 여행이잖아요. 괴롭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는 괴롭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냥 놀러 다녔어요.
 
브루넷: 요즘 문창과 입시 트렌드는 잘 모르시죠.
 
소양: 저는 문창과 입시 트렌드에 대해 알았던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그걸 알아서 뭐 하지?
 
브루넷: 문예창작도 과외 받더라고요.
 
소양: 아휴. 그 과외선생 하는 애들도 스무 살짜리 아녜요?
 
브루넷: 트렌드를 가장 최근에 겪은 사람들이기도 하죠.
 
소양: 그런데 뭘 가르친다는 거지? 자기도 이제 막 대학에 갔으면서 뭘 가르친다는 거지? 도움은 줄 수 있겠지만 과외선생님이라고, 커리큘럼이라고 할 정도로 뭐가 있나?
 
브루넷: 수학이나 영어 과외라고 하면 납득할 텐데 파는 상품이 글쓰기라서 그렇게 생각하시나 봐요.
 
소양: 그에 대한 반감이 너무 큰 거죠. 이 모든 제도를 통과하고 나니까 큰 반감이 생겼어요.
 
브루넷: 글은 그런 수업 전혀 받지 않아도 쓸 수 있다?
 
소양: .
 
브루넷: 심지어 문창과 안 나온 사람 글이 더 좋기도 하고.
 
소양: 정말요.
 
브루넷: 문창과 수업들은 광범위한 교양수업 느낌일까요?
 
소양: 선생님 재량이 커요. 회화나 조각이나 음악은 기술적인 테크닉을 도와줄 수 있는데 문창과에서 선생님이 주는 도움이란 정신적인 거죠. 그게 문제인 거고, 사실.
 
브루넷: 그 와중에도 좋은 선생님들이 계시죠?
 
소양: 그럼요. 저는 선생님들께 정말 많은 걸 배웠죠. 학교 졸업하고 십 년 동안 제가 좋아한다고 얘기하는 것들은 거의 다 거기에 기반을 두고 있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많은 걸 가르쳐주셨기도 하지만 제가 많이 배운 거죠.
 
브루넷: 그 페미니스트 선생님은 뭘 가르치셨어요?
 
소양: 소설 선생님이셨어요. 그 선생님한테 문학도 배우고 페미니즘도 배우고 어떤 시민성에 대한 교육도 받고 시사교육도 받고 인생에 대한 태도도 배웠어요. 그런 걸 배우려면 얼마든지 배울 수 있어요. 선생님이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간에 학생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배울 수 있어요. 저는 모범생이었기 때문에 다 배운다고 생각을 한 거죠.
 
 
7. 페미니즘 공동체
 
브루넷: 소양 님이 대학생활 하던 때가 박근혜 퇴진 촛불시위 하고 문단 내 성폭력 고발도 있고 시민운동이 활발하던 때였는데 그런 분위기가 지금은 소강상태에 들어갔잖아요. 코로나19도 겹쳤고. 그런 환경의 변화에 대한 소회가 있으실까요?
 
소양: 저희는 어떻게 보면 좋은 시기에 학교를 다녔던 것 같아요. 저희가 학교에 들어오기 일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A교수가 강의실에서 담배를 피웠대요. 그래도 괜찮았던 시절이었던 거죠. 그러다가 박근혜 정권 때 담배 값도 오르고 하니까 에이, 안 피울란다 하고 끊어버렸대요. 저는 A교수의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수업을 들었는데 그때는 담배도 안 피우고 저는 그 수업이 좋았어요. 많이 배웠고 A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이후에 실기 수업을 들은 친구들이 다른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때까지만 해도 그런가보다 했죠. 그러고 나서 A에 대한 고발이 나왔어요.
 
브루넷: 소양 님이 못 느낀 걸 후배들은 감지했다는 것은 그 사이에 기준이 높아져서 그런 걸까요? 마치 실내흡연처럼 예전에는 문제시되지 않았던 언행이 어느 시점 이후로는 용납되지 않게 된 걸까요?
 
소양: 타이밍이 달랐던 거예요. 제가 A에 대해 좋게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이유가 있어요. 고등학교 때 소설 선생님이 제가 어디 문창과 합격했다고 하니까 거기 A가 있는데 소설이론이 훌륭하니 많이 배워라 이렇게 얘기해주셨던 것도 있고, 저희 대학에 소설 교수가 두 명이었어요. 한 명은 A, 한 명은 C인데 저는 C를 싫어하거든요. 지금도 어떤 면에서는 A보다 C가 더 싫어요.
 
브루넷: 저는 C도 많이 읽었는데.
 
소양: 저도 많이 읽었어요. 고등학교 때도 읽고 수업시간에도 읽고 그랬는데 사람이 멋이 없어요. A는 그래도... 그 사람은 등단도 안 했거든요.
 
브루넷: 경마장 가는 길있잖아요.
 
소양: 정식 등단은 안 했어요. C는 가까이에서 보면 멋이 없는 사람이에요. A는 훨씬 큰 인물이에요. 훌륭하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 자체 사이즈가 커요. 수업시간에 이문열 얘기도 하고 연세대 마광수 얘기도 했는데 그런 사람들하고 자기를 대등한 입장에서 얘기를 했어요.
 
브루넷: 마광수는 저도 매력적으로 느꼈어요.
 
소양: 수업 들어보셨어요?
 
브루넷: 저희 때가 그 사람이 한창 재판받고 마녀사냥 당할 때였어요. 마광수 수업 못하게 하고 출판금지시킨 것에 대해 학생회에서 항의 대자보 쓰고 마광수 초청강연 열고 그랬죠. 그 강연을 들었어요.
 
소양: 그게 다 맥락적인 거잖아요. 마광수가 얼마나 이상한 사람이었건 간에.
 
브루넷: 안 이상했어요. 다른 교수들에 비해 아주 멀쩡했어요.
 
소양: 저한테 A가 그런 느낌이었던 거예요. 이상한 사람인데도. 마광수가 고통 받았던 것에 대해 얘기하고 이문열에 대해서도- 이문열보다 A가 선배예요.
 
브루넷: 선배라고요? A90년대에 경마장 가는 길나오기 전까지는 이름도 없던 사람이고 이문열은 그 이전에 히트작이 얼마나 많았는데.
 
소양: 자기가 더 이거라는 식으로 얘기해요. 남자 허세일 수도 있는데 아무튼 이문열은 정치적으로 보수꼴통이잖아요? A는 보수적인 늙은이긴 한데 보수꼴통은 아니에요.
 
브루넷: A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총아였거든요.
 
소양: 이문열을 무시했어요. 수업시간에 학생들 앞에서 이문열 험담을 하는데 그런 게 재밌었어요. 그 사람 소설 이론도 흥미로웠어요. 수업시간에 읽으라고 줬던 책 목록도 좋았어요. 다른 친구들은 싫어했죠. 모비 딕을 일주일 만에 읽어오라고 하니까 고리타분하기도 하고 왜 읽으라고 하는지 이해도 안 된다고. 저는 그런 식의 문학교육에 익숙했기 때문에 괜찮았어요.
 
브루넷: 그런데 A가 문제된 것은 교수방법이 아니라 성추행이잖아요.
 
소양: 그래요. 맞아요. 그런데 선생으로서 저한테는 괜찮았어요. 문창과는 졸업 전에 문학답사를 두 번 가야 돼요. 웃긴 제도죠. 왜 가야 되는지 몰라요. 1학년 때 거길 갔는데 안동 가서 이문열을 만나는 시간이 있었어요. C가 답사를 이끌고 갔는데 이문열이 자기가 얼마나 대중한테 오해를 받는지에 관해 두 시간 얘기했나? 지겨웠죠. 그런데 C아이고, 선생님하면서 고개를 숙이는데 진짜 가오 없어 보이더라고요. 존경의 표시일 수도 있죠. 그렇지만 속물적으로 보이기도 했어요.
 
브루넷: C의 연애소설들을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사람은 그냥 한국남자예요. 너무 한국남자다운 로맨스를 썼는데 한국사회가 여성혐오에 둔감해서 잘 팔렸던 것 같아요.
 
소양: 어디 여행 가서 자살하려는 여자 붙잡아서 자고 그런 얘기잖아요. 외국여자랑 자고 온갖 여자랑 자고 다니는 얘기죠.
 
브루넷: 이십 세기에는 어쨌든 재밌게 봤어요.
 
소양: 인간적으로는 호감 느끼기 어려웠어요. 오히려 A는 사석에서 보면 시원시원한 인물이라서 더 좋아할 수 있었어요. 그래도 문제는 많았죠. 이상한 인물이죠. 학생들 데리고 노래방 가서 블루스 췄어요. 저는 그런 모습을 못 보고 쿨한 모습만 본 거죠. 운이 좋았달까. 그래서 그 사람한테 배울 수 있었던 건 배운 거죠. 그런데 그 운이라는 게 참 우습죠. 공동체에서 성폭력 사건이 일어났을 때 성폭력 사건 자체도 충격적이지만 문제는 그런 일을 한번 겪고 나면 공동체가 와해된다는 거예요. 그게 재건되기란 쉽지 않아요. A 이후에 들어온 학생들과 수업 들어본 적이 있는데 그 문제에 경도돼서 작업을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브루넷: 성폭력 이슈에요?
 
소양: . 다른 식으로 볼 수가 없는 거죠. 그 학생들은 피해를 본 거예요. 그런 걸 계속 신경 쓰면서 학교 다니는 것 자체가 손해죠. 어떤 사건이 생겼을 때 당연히 경도될 수밖에 없죠. 그건 모두가 겪게 되는 현상이고 일시적인, 과도기적인 현상인데 그걸 학교에서 제대로 재건할 수 있는 자원을 마련해주지 않은 상태에서 학생들이 뭐라도 하려고 하니까 굉장히 황폐한 상태에서 학교를 다니게 된 거죠. 그건 굉장히 큰 손해라고 느꼈어요. 저는 그래도 우리 과는 괜찮다고 느끼면서 학교를 다녔어요. 물론 까보니까 다 썩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거기서 많이 배웠다는 자긍심이 있는데 그 이후에 들어온 분들은 자긍심 같은 걸 도저히 느낄 수가 없는 상황이었죠. 그 후 어떤 남자선생님이 왔는데 그 사람이 형편없었던 것도 맞지만 학생들도 거기에만 촉각을 세우게 되는 거죠. 그런 총체적인 상황이 학생들이 받는 피해기도 한 거고요. 그 뒤에 다른 남자교수들은 다 도망갔거든요. 누구는 번역원 원장으로 갔고, 누구는 자기는 힘이 없다며 관두고. 미디어를 통해 C가 나오는 걸 보면 말은 그럴싸하게 해요. 그런데 학교에서는 비겁하게 행동했어요. 그러면서 학과가 전체적으로 침체되고 침체되면 학교에서 지원을 안 해주는 악순환이 되는 거죠. 성폭력 사건은 안 일어나는 게 제일 좋은 거죠. 그런데 일어났으니까 공동체적인 해결이 필요한데 다들 그걸 잘 못 견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공동체적인 해결이 되기 어렵고 보통은 그걸 못 견뎌서 회피하거나 공동체 자체가 와해된다. 그리고 그 후유증은 굉장히 오래 간다.

브루넷: 제 애 고등학교 때 남학생들 단톡방에서 여학생들 성희롱이 일어났어요. 그게 폭로돼서 가해자 그룹과 피해자 그룹으로 나뉘었어요. 학교에서 가해 학생들을 퇴학시키지 않는 선에서 줄 수 있는 최대치의 징계를 주긴 했지만 아이들 사이의 갭은 메꿔지지 않았고 걔들은 수학여행도 절반밖에 안 갔어요. 지금도 동문회 같은 건 할 수도 없어요. 거기도 와해된 공동체예요.
 
소양: 그 여자애들은 십 년, 이십 년 동안 그 기억을 가지고 있을 거 아녜요. 인간에 대한 불신을 갖고 가는 거잖아요.
 
브루넷: 친한 애들끼리 보는 거지, 학교 이름 걸고는 절대 안 모여요.
 
소양: 괴롭잖아요. 만나서 좋은 일이 뭐가 있어요.
 
브루넷: 학교를 찾아가는 일도 없어요. 대안학교라 한 학년에 오십 명도 안 됐는데 뿔뿔이 흩어졌어요.
 
소양: 저도 동기들과 연락 안 해요. 못 하는 거죠. 이제 제 나이 또래에도 데뷔하는 사람들이 나오잖아요. 그럼 우리 동기들 중에서는 누가 글을 쓰고 있나. 그런 생각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것만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이런 경험들이 글을 안 쓰게 만들지 않나. 글을 쓰거나 활동하는 걸 안 하게 만들지 않나. 등단을 안 하든지 못 하든지 간에 문학 관련 행사장 가면 마주칠 수도 있는 것 아녜요. 정말 마주쳐지지가 않아요. 이건 문단 내 성폭력 때문이 아니라 대체적으로 고등학교 문창과를 나오면 대학에서는 글을 안 쓴다는 얘길 많이 하는데 뭐랄까, 고등학교 문창과라는 환경 자체는 괜찮은데 거기서 통과해야 하는 제도에 대한 환멸, 시스템이 주는 환멸 때문에 약간 질려 버려요. 저는 백일장 제도가 너무 싫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등단도 그래요. 사람들이 등단 스터디를 한다는 거예요.
 
브루넷: 고시 공부 하듯이.
 
소양: , 너무 싫은 거죠. 그런 게 너무 잘 보이는 거죠.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고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고. 그냥 쳐다보기가 싫어요. 좋은 감정이 안 들어요.
 
브루넷: 시스템 내부에서는 여전히 남성들 파이가 크고.
 
소양: .
 
브루넷: 다질 님이 그 얘기도 하더라. 페미니즘이 어느 정도 상식인 학교 안에 있다가 졸업하고 나서 사회에 나오니까 여성혐오적인 세태가 실감난다고. 대학시절이라도 페미니즘의 울타리 안에서 보냈던 것은 좋았을 것 같아요.
 
소양: 최고의 시절을 보냈죠. 행복했어요. 고등학교 때도 행복했고 대학교 때도 행복했어요. 저는 2015년에 학교 들어갔는데 그때 한국에서 페미니즘이 이슈화됐어요. 그걸 처음부터 보고 내가 거기 참여하고 있다는 게 벅찼어요. 그때 봤던 것들을 잊지 못해서 내가 거기 살겠구나 생각했어요.
 
브루넷: 윤석열 정부 하에서 여성학 대학원 다니는 지금은요?
 
소양: 그것도 저는 상관없어요. 사람이 자기가 살아온 시간선을 기준으로 생각하게 되잖아요. 나한테 대학에서 페미니즘 활동이 뭐였나 생각해보면 힘들고 고달프고 고통스러운 것도 많았지만 굉장히 즐겁고 행복하고 너무 반짝거리고 세상에 이것보다 더 강렬한 건 없는 그런 걸 많이 느꼈어요. 제가 미친 거죠. 거기에 미쳐 가지고 계속 그런 걸 생각하면서 내 인생을 여기 다 던질 수 있는 어떤 거라고 생각하고 가는 거예요. 2016년에 박근혜 퇴진 집회도 있었고 2016년에 문단 내 성폭력도 있었어요. 둘 다 고통스러운 사건이었죠. 그런데 동시에 굉장히 많은 여성들이 집회에 참여하고 그 속에서 많은 역동적인 일들이 일어나고 고무적인 것을 많이 봤어요. 박근혜 퇴진시위에서 여성혐오가 많이 나와서 페미존 결성을 하고 문단 내 성폭력이 어땠고 그런 것도 있지만 아름다운 집회, 아름다운 시위, 아름다운 행사, 하하, 이런 걸 제가 너무 많이 봤어요. 생각해보면 고통은 좀 무뎌지고 아름다운 기억만 윤색돼서 남은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어요. 그 안에서 정말 아름다운 어떤 것들은 간직하고 있는데 조금 지나서 대학에 들어온 친구들을 동아리에서 만나보면 ‘2018년에 한국에서 페미니즘이 가장 부흥했잖아요.’ 이렇게 얘기해요. 제가 ‘2018년이라고요? 2018년에 뭐 했죠?’ 하니까 혜화역 시위라는 거예요. 너무 고통스럽죠. 그건 정말 고통스러울 것 같아요. 저는 혜화역 시위에서는 그 안에 내가 잘 동기화가 안 되었다고 느껴요.
 
브루넷: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시위에 소양 님이 완전히 동기화될 수는 없었겠죠.
 
소양: 없었어요. 그렇지 않은 집회도 봤고 거기서 내가 정말로 행복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에. 그런데 어떤 친구들한테는 혜화역 시위가 자신이 최대로 동기화될 수 있었던 경험인 거예요. 저는 2016년 박근혜 탄핵 시위 때 여성과 성소수자와 장애인과 우리 가난한 젊은 여자애들을 위한 자리를 만들라고 시위한 것과 혜화역 시위라는 것은 너무 다른 경험일 거라고 생각해요. 혜화역 시위는 편파수사에 항의하는 거잖아요. 그것도 디지털 성폭력을요. 그 에너지 자체가 다른 것 같아요. 거기서 뭔가 좋은 걸 발견하기는 힘들었을 것 같아요. 좋은 게 물론 있겠지만 훨씬 힘든 것 같아요. 박근혜 퇴진 시위 때는 페미니스트 단체들이 시국선언도 하고 그랬거든요. 다른 세상을 위한 시국선언이라고 해서 우린 어떤 세상을 원한다고 다들 꿈꾸는 것을 이야기했어요. 혜화역 시위는 고통스럽잖아요. 한남들이 찍는 불법촬영과 편파수사와 법정의 이중 잣대에 관해 얘기하는데 너무 고통스럽죠.
 
브루넷: 그래서 혜화역 시위 주최자들이 더 날카롭게 전선을 긋고 선명성 투쟁을 했을 수도요. 래디컬 페미니스트들과도 친하세요?
 
소양: 그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는데 그분들이 저를 거부하지 않는 이상 저는 잘 지내요. 얘기할 수 있고 친해질 수 있으면 잘 지내요. 나이브한 얘기일 수도 있어요. 제 이런 태도가 어떤 친구들은 속상할 수도 있죠. 그 페미니스트들은 나 같은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데 너는 그런 페미니스트들과 친구할 수 있니? 그런데 저는 그럴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요즘의 소강상태에 대해 생각을 했어요. 2015년부터 이 흐름을 보고 있으면 지금이 소강상태고 백래시고 뭔가 이것들이 사라져가나? 아니면 뭔가 더 반동적인 게 오나? 그랬는데 최근에 생각이 바뀌었어요. 그저께 저희 과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었는데 이번에 저희 여성학과에 세 명이나 들어온 거예요. 두 명, 두 명, 한 명 들어오다가 세 명! 이건 정말 많이 들어온 거예요. 어떻게 세 명이나 들어오지? 다들 엄청 좋아하면서 그분들하고 얘기했는데 놀랐어요. 저는 문학에 대해서도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게 있어요. 한국문학이 지금 제가 학교 다닐 때보다 훨씬 인기가 많아지고 시장성 있는 장르가 됐지만 그래도 한국문학이 잘 될 수 있을까? 모르겠어, 약간 이런 마음이 있어요. 문단 내 성폭력 이후로 뭐가 근본적으로 바뀌었나 싶고 그 이후에 더 나은 흐름이 생겼는지도 모르겠고. 페미니즘도 이렇게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 누가 페미니스트가 되려고 하지? 했단 말예요. 그런데 제가 올해 들어 문학행사에 많이 다녀보면서 놀란 것은 아직도 시를 쓰기 시작하는 사람이 많다는 거예요. 실존적 선택으로 여성학과에 온 신입생들을 보면서도 아, 언제나 뭐든 새롭게 다시 시작되는 거구나. 이런 걸 느껴요. 그러니까 소강상태고 어떻고 하는 건 굉장히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거다. 세상은 그렇지 않고 어딘가 다른 곳에서는 새로운 것들이 시작되고 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게 됐어요.
 
 
8. 김언희
 
브루넷: 좋아하는 작가 얘기해볼까요? 가져오신 책들 좀 보여주세요.
 
브루넷: 김언희 시집이 이렇게 많다니.
 
소양: 저도 생각 못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쌓였더라고요.
 
브루넷: 김언희 시인을 좋아하신다는 건 확실히 알겠어요.
 
소양: 그런데 최근까지도 그 좋아하는 걸 어떻게 말할지 몰랐어요. 김언희 시가 키워드로 얘기하면 엽기’-
 
브루넷: 정말요? 저는 반가부장이라는 키워드가 떠오르는데요.
 
소양: 아니면 그로테스크’, 굉장히 선정적인 걸로 얘기되는 것 같아요. 그 중에 어떤 것도 정확하게 들어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떤 면에서는 제가 페미니스트로서 이 분에 대해 뭔가를 얘기하는 것도 부적절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만약 페미니스트 비평을 한다면 다른 방식으로 하고 싶은 거죠. ‘반가부장적이다로는 부족한 것 같아요. 저는 당시의 그 논쟁을 본 게 아니라서 모르겠지만 김언희 시에 대해서 김정란 시인-시인이자 비평가이기도 하시잖아요? 한국의 페미니스트 시인이기도 하고요-, 그 분이 공격을 한 적이 있다고 해요. 김언희는 반페미니스트다.
 
브루넷: 어떤 근거로요?
 
소양: 남성들의 성적 욕구에 복무한다는 식으로 읽었다고 해요. 그런 논쟁이 있었기 때문에 김언희 시가 단순히 반가부장적이라는 것과는 다른 맥락이 더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브루넷: 더 여러 겹의 레이어가 있다.
 
소양: . 한국문학장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에 대한 얘기도 필요할 것 같고요.
 
브루넷: 김언희 시인은 페미니스트라는 자의식을 갖고 쓰셨을까요?
 
소양: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최근 어떤 서점에서 김언희 시인 관련 행사가 열려서 가서 얘기 들었는데 제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훨씬 더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이 있는 분이라고는 느꼈어요.
 
브루넷: 저는 김언희 시인의 시는 한 편밖에 몰라요. 그때 소양 님이 보여주셨던.
 
소양: 한 잎의 구멍.
 
 
한 잎의 구멍*
김언희
 
나는 한 구멍을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 같은 쬐그만 구멍, 그 한 잎의 구멍을 사랑했네. 그 구멍의 솜털, 그 구멍의 맑음, 그 구멍의 영혼, 그 구멍의 눈물,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구멍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구멍을 사랑했네. 구멍만을 가진 구멍, 구멍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구멍, 구멍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구멍, 눈물 같은 구멍, 슬픔 같은 구멍, 병신 같은 구멍, 시집 같은 구멍, 그러나 누구나 가질 수는 없는 구멍
 
영원히 나 혼자만 가지는 구멍, 나 밖에 아무도 가질 수 없는 구멍,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가혹한 구멍

*오규원의 한 잎의 여자를 덮어쓰다.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민음사, 2000)
 
 
브루넷: , 그거랑 가족극장, 이리 와요 아버지. 두 편 아는구나. 두 편 다 보자마자 이것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면 나올 수가 없는 시라고 생각했어요.
 
 
가족극장, 이리 와요 아버지
김언희
 
이리 와요 아버지 내 음부를 하나 나눠드릴게 아니면 하나 만들어드릴까 아버지 정교한 수제품으로 아버지 웃으세요 아버지 아버지의 첫날밤 침대 맡에는 일곱 어머니의 창자로 짠 화환이 붉디 푸르게 걸려 있잖아요 벗으세요 아버지 밀봉된 아버지 쇠가죽처럼 질겨빠진 아버지의 처녀막을 찢어드릴게 손잡이 달린 나의 성기로 아버지 아주 죽여드릴게 몇 번이고 아버지 깊숙이 손잡이까지 깊숙이 아버지 심장이 갈래갈래 터져버리는 황홀경을 아버지 절정을 아버지 비명의 레이스 비명의 프릴 비명의 란제리로 밤단장한 아버지 처년 척하는 아버지 그래봤자 아버진 갈보예요 사지를 버르적거리며 경련하는 아버지 좋으세요 아버지 아버지로부터 아버지를 뿌리째 파내드릴게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민음사, 2000)
 
 
소양: 그런데 한편으로 이 분은 페미니스트 시인이자 비평가로부터 공격받은 적이 있는 시인이기도 한 거죠. 거기에 대해 어떻게 볼 것인가.
 
브루넷: 버지니아 울프도 공격 받잖아요. 페미니스트 진영 내에서도.
 
소양: 제가 김언희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기 싫을 정도로 좋아하는 것 같아요.
 
브루넷: 페미니스트가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시인이 그런 의식 없이 썼는데 독자가 자의적으로 페미니스트 시라고 해석하는 것도 별로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김언희 시는 읽자마자 와, 페미니즘을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구나 감탄했어요.
 
소양: 김언희를 페미니스트라고 단언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제 페미니스트 취향으로 너무 좋아하긴 하죠. 이렇게밖에 얘기를 못 하겠어요.
 
브루넷: 김언희가 자기 시에서 아빠를 강간한다면 이소호는 엄마를 강간하더라고요? 읽으면서 저는 최승자가 없으면 최영미가 안 나왔겠다 싶듯이 김언희와 이소호도 한국 여성주의 시의 한 맥락을 구성한다고 느꼈어요.
 
 
잘 들어 엄마
엄마는 이제 여자도 뭣도 아냐
내가 이렇게 엄마 다리 사이를 핥아도 웃지를 않잖아
봐 봐
이렇게 손가락 세 개를 꽂아도 느낄 줄 몰라 엄마는
 
-이소호, 경진이네 -거미집일부 (캣콜링, 민음사, 2018)
 
 
브루넷: 행사에서 뵌 김언희 시인은 무슨 말씀을 하시던가요?
 
소양: 시집서점 위트앤시니컬에서 열린 행사였는데 저는 다 마감이 된 상태에서 다질한테 연락을 받았어요. 대기라도 걸어놔야겠다 했는데 그날 밤에 다질한테 또 연락이 왔어요. 추가로 다섯 자리를 더 열어놓는다니까 해보라고요. 그렇게 간 거예요. 다질이 알려줬으니까 다질 것까지 끊어야겠다는 정신도 없이 그냥 제 것만 빨리 신청해서 갔어요. 망설이면 분명 표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아무튼 그렇게 갔는데 음. 버지니아 울프 같은 경우는 제가 뭐라고 가타부타 하지 않아도 그 지위가 너무 확실하죠. 김언희 시인은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더 말하기 어려운 것 같기도 해요. 방금 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이소호가 있기 전에 김언희가 있었다는 비평적 정립이 안 되어 있기 때문에 신중해지는 거죠. 어떤 식으로 이 계보를 이해할 것인가. 저한테 김언희는 너무 큰 사람인데 직접 만나 보니 김언희 시인은 제가 생각했던 것과 굉장히 다른 사람이기도 했어요. 이 분 시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읽어 보면 이 시인은 어떤 사람일 거라는 식의 이미지를 갖게 되잖아요. 저는 이 사람이 고등학교 영어교사라는 걸 알고 깜짝 놀랐어요. 그날 낭독회는 아니었고 그냥 문학행사였는데, 자기는 독자들을 만날 생각을 해본 적도 없고 낭독회라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한대요. 시인의 육성을 필요로 하는 시도 있지만 어떤 시는 그냥 묵독하면 되고 자기 시가 그렇다고 생각한대요. 묵독 혹은 숙독. 심사숙고해서 읽는 숙독이 필요한 시이지, 낭독할 시는 아니라고 얘기하셨는데 사실 김언희 시인은 낭독을 굉장히 잘하세요. 아주 정확하게 낭독하세요. 자기 시를 놀랍도록 정확하게 잘 읽어요. 저도 고등학교 때부터 문창과 나왔으니까 정말 많은 시인들, 많은 작가들이 자기 작품 읽는 것을 들어왔단 말이에요. 저는 취향도 있어요. 어떤 시인이 자기 시를 읽는 어떤 스타일이 너무 좋다, 이런 것도 있는데 김언희 시인은 거의.
 
브루넷: 베스트?
 
소양: 베스트 오브 베스트였어요. 들어볼 수도 있어요. 유투브에 몇 개 있을 거예요.
 
브루넷: 팟캐스트에도 나오셨던 것 같아요.
 
소양: 김사인 시인이 진행하는 <창비라디오>에 나오셨을 거예요. 김언희 시인 같은 분은 굉장히 화려하게 보일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뵈었을 때 인상은 고행자처럼 느껴졌어요. 굉장히 강한 언어를 쓰시기 때문에 소재주의 같거나 어떤 테마에 꽂힌 사람처럼 보일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시에 충실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브루넷: 소재주의나 선정주의와는 다르죠.
 
소양: 너무 다르죠. 그런데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상상했던 것과 다른 분이셨어요. 서른아홉인가 마흔한 살인가에 데뷔하셨대요. 지금은 일흔한 살이세요.
 
브루넷: (놀람)
 
소양: 상상이 안 가죠. 이런 시를 쓴 사람이 일흔한 살. 너무 압도적이잖아요. 이 분이 들려준 자신의 생활은 일종의 수행 같았어요. 정말 시만 쓰는 사람이구나. 이 분이 진주 분이에요.
 
브루넷: 경상남도 진주.
 
소양: . 진주에서 계속 사셨나 봐요. 자기는 촌년이다, 시골사람이다, 서울 오려면 비행기 타고 나와야 된다고 하세요. 자신이 만약 독자들을 만난다면 일생에 단 한 번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는데 몸이 안 좋아져서 그걸 좀 앞당기고 싶으셨대요. 이런 시도 있어요. 시달렸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나온 시 같아요.
 
 
나는 참아주었네
김언희
 
나는 참아주었네, 아침에 맡는 입 냄새를, 뜻밖의 감촉을 참아주었네, 페미니즘을 참아주고, 휴머니즘을 참아주고, 불가분의 관계를 참아주었네, 나는 참아주었네 오늘의 좋은 시를, 죽을 필요도 살 필요도 없는 오늘, 참아주었네, 미리 써놓은 십 년치의 일기를, 미리 써놓은 백 년치의 가계부를, 참아주었네 한밤중의 수수료 인상을, 대낮의 심야 할증을 참아주었네 나는, 금요일 철야기도 삼십 년을, 금요일 철야 섹스 삼십 년을, 주인 없는 개처럼 참아주었네, 뒷거래도 밑 거래도 신문지를 깔고 덮고 참아주었네, 오로지 썩는 것이 전부인 생을, 내 고기 썩는 냄새를, 나는 참아주었네, 녹슨 철근에 엉겨 붙은 시멘트 덩어리를, 이 모양 이 꼴을 참아주었네, 노상 방뇨를 참아주었네, 면상 방뇨를 참아주었네, 참는 나를 참아주었네, 늘 새로운 거짓말로 시작되는 새로운 아침을, 봄바람에 갈라터지는 늙은 말 좆을,
 
-요즘 우울하십니까?(문학동네, 2011)
 
 
소양: 너무 이해가 되죠? 페미니스트여도 페미니즘을 참아줘야 될 때가 있잖아요. 페미니즘을 참아주셨다고 하는 분께 그저 그런 페미니즘 비평을 들려드리고 싶지 않아서 말을 삼가게 되는 게 있어요.
 
브루넷: 저는 이런 시어를 구사하는 젊은 여성시인이 있구나 했어요. 요새 많이 읽히는 힙스터 여성시인인가보다 했죠. 그런데 경상도에서, 학교에서, 결혼제도 안에서 이런 사고를 가지고 살았던 우리 윗세대 여성이었구나.
 
소양: 긴 말씀 하진 않으셨지만 여러 가지를 참으셨대요. 이 시가 떠오르더라고요. 이런 사람한테 어떤 말을 갖다 댈 때는 좀 들을 만한 말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행사 때 질의시간도 있었지만 사실 질문할 것도 없는 거예요. 너무 완전해. 이 사람 시에 대고 이건 소위 말하는 예쁜 시는 아니잖아요. 소위 말하는 어떤 시는 아니잖아요.’라고 하는 것도 뭔가 부적절하게 느껴졌어요. 이 분의 사무치는 어떤 것들이 느껴졌어요. 아픈 몸을 끌고 온 사람을 괴롭히고 싶지도 않았어요. 존경하는 마음이나 전하고 싶었어요. 가서 말씀드렸죠. 선생님, 저한테 한국시의 넘버원은 김언희 시인이세요. 사인 받으면서 이렇게 얘기했더니 웃으시는 거예요. 뭔가 전달이 안 된 느낌이 들어 울컥하는 거예요. 내가 사는 동안 이 사람을 다시 만날 일이 있을까? 아프셨다는데 이 분의 일곱 번째 시집을 내가 읽을 수 있을까? 모르는 거잖아요. 이 순간에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울컥하면서, 울먹이면서, 한국어 화자로 태어나 선생님 시를 읽은 것은 정말로 행운이었다고 말했더니 손을 잡아주셨어요. 그래도 내가 그 말 한 마디는 전했다. 독자로서. 팬으로서. 그리고 꽃다발도 드리고. 그 전날 동네 책방엘 갔는데 이런 색의 수국이 있었어요. 그걸 본 순간 내가 지금 꽃집에 가서 더 비싸고 더 화려한 꽃을 사도 이 색깔보다 더 적절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결국 그 다음날 책방 사장님께 그 꽃을 받아 가지고 가서 드렸어요. 제가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를 제일 좋아하는데 그 시집의 표지 색도 이 비슷한 색이에요. 김언희 레드? 김언희 퍼플? 김언희 마젠타? 뭐라고 해야 될지 모르겠는데 이 비슷한 색의 소국이었어요.
 
브루넷: 시집 아무데나 펴서 읽어도 좋네요.
 
소양: 너무 좋아요.
 
브루넷: 연금 받을 때까지 교직을 무사히 마치셨다는 게 놀라울 정도로 파격적인 시들이에요.
 
소양: 첫 시집(트렁크, 1995) 시인의 말에 이렇게 적혀 있어요.
 
 
저문 날 지붕 위에 올라가 앉아 있으면 검은 도둑고양이 한 마리가 소리 없이 발치에 와 웅크린다. 언제나 팔을 뻗어 닿을 수 없는 거리를 유지한 채...... 길들일 수 없는 짐승. 밤보다 더 검은 놈. 배반의 명수. 고양이는 주인을 선택한다.
 
이 시편들 역시 독자를 선택할 것이다. ......배반하려고.
 
1995년 여름
김언희
 
 
브루넷: 멋있다.
 
소양: 그날도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시들이 독자를 선택한다고 생각한다고. 그것이 바로 여러분들이라고. 감동적이었어요. 시들이 독자를 선택할 것이기 때문에 베스트셀러가 되고 말고는 상관없는 거죠. 시들이 선택하는 독자가 이 시에게 오는 거죠. 순서대로 하면 이게 가장 최근에 나온 시집인데 이런 시. “나는 내 음문의 비위에 맞지 않는 건, 단 한 줄도 쓰지 않았다.” 여기에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김언희 시인은 한국어 상소리사전까지 연구하실 정도로 한국적인 맥락에서 쓰세요. 한국어 화자로서 그의 작품을 읽어 행운이라는 생각이 드는 작가가 나한테는 누굴까 생각을 해보면 정말로 김언희가 떠올라요. 번역을 거치지 않고 내가 이 모든 맥락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다. 한국여자인 내가 이 시를 읽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이런 시가 있어서.
 
브루넷: 최승자는 어땠어요?
 
소양: 최승자도 좋아하죠. 사실 읽은 지 오래됐어요. 그리고 많이 읽지는 않았어요. 즐거운 일기정도 읽었어요. 솔직히 말하면 시가 잘 기억 안 나요.
 
브루넷: 제 성장기에 실시간으로 시집이 나왔던 슈퍼스타였어요.
 
소양: 최승자는 한국 시의 영원한 슈퍼스타 아닐까요?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그 최승자도 사실 시단이라는 어떤 맥락에서는...
 
브루넷: 오랫동안 말도 안 되게 인정 못 받았죠. 다른 남자시인들이 상 받고 교수할 동안.
 
소양: 비슷하게 저한테 김언희는 너무 큰 인물인데 시단이라는 맥락에서 보면 소외된 인물이고 제대로 평가된 적 없는 인물일 수 있어요.
 
브루넷: 지방시인, 선정적인 시를 쓰는 시인.
 
소양: , 그냥 그 정도로 소비되고 페미니스트 비평가이자 동료시인이기도 한 사람한테 당신은 반(anti)페미니스트라는 소리도 듣고.
 
브루넷: 그런 말에 연연하지 않으실 것 같아요. 본인이 시를 쓸 수 있는 한 됐다고 생각하지 않으실까요?
 
소양: 제가 김언희를 항상 좋아했는데 그냥 날아와서 꽂힌 것이기 때문에 왜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브루넷: 너무 뛰어나고 강렬해서 안 그러기가 더 힘든 시인 같아요. 호불호는 갈리겠지만.
 
소양: 김언희는 한국시에 있어 저의 최애예요. 예전에 이연주도 굉장히 좋아했어요. 이연주 시인은 요절했기 때문에 신화화된 면이 있어요. 의정부 기지촌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시를 썼다고 해요. 이연주 시인도 독보적이지만 이연주는 제가 만날 수 없잖아요. 김언희도 만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만났고 거의 신비체험이었어요. 행사 마친 후 다질과 같이 술 마셨는데 별로 말도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냥 되새기면서 앉아 있으면 돼. 문학을 한다는 것. 글쓰기 노동의 지위에 대해 많은 논의가 필요하지만 저는 김언희 시인의 생각에 공감해요. 뭐라고 하셨냐면 자기는 까먹고 살다가 몇 달에 한 번씩 인세가 들어오는데 많은 금액은 아니고 뭐 5천원 들어오더라도 아, 내 시집이 계속 팔려서 독자들과 만나고 있구나. 조금씩, 조금씩 찍혀서 만나고 있구나. 이런 게 큰 기쁨이라고 얘기하시고. 시인은 나눠주는 사람인 것 같다. 자기 살점을 나눠주는 사람이 시인이다. 시는 전부를 요구한다. 이런 말들이 어떻게 보면 현대적인 노동에 대한 생각과는 안 맞을 수도 있지만 전 정말 거기에 공감했어요.
 
브루넷: 김언희 시인은 전업작가와는, 특히 전업시인과는 포지션이 다르죠. 일단 연금이 나오는 분이잖아요. 자기만의 방과 500파운드가 있잖아요.
 
소양: 최승자처럼 혼자였다면 어땠겠냐는 거죠?
 
브루넷: 이 분의 직업은 시인이 아니에요. 아니, 직업은 직업인데 생계를 유지하는 직업은 아니죠.
 
소양: 제가 느끼기에 이 사람은 시인이라는 게 자신의 전부예요. 오히려 나머지가 부차적인 것처럼 보였어요.
 
브루넷: 하지만 시로 생계를 유지한 건 아니니까 낭만적인 말을 할 수도 있는 거죠.
 
소양: 낭만적인 게 아니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문 거죠. 말씀하신 것도 맞아요. 교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이 있기 때문에 그런 얘기를 할 수도 있는 거지만 동시에 시에 모든 걸 걸고 싶다고 해서 모두가 그럴 수 있지는 않거든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거예요. 그것도 시인으로서 행운일 수도 있고. 자길 힘들게 하는 어떤 걸 수도 있고. 그 자리에 시인들도 많이 왔거든요. 누가 물었어요. 선생님, 시가 모든 걸 요구한다는 것에 너무나 공감하는데 사실 모든 걸 다 걸기가 어렵다. 생활적인 것도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 자기 모든 걸 건다는 것은 굉장히 큰 결단이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선택은 아닌 것 같아요. 그게 꼭 시가 아니어도. 어떤 것에 자기 모든 걸 걸겠다고 했다 해서 정말로 모든 걸 거나요? 보통 사람은 선택할 필요도 없죠. 할 수도 없고.
 
브루넷: 경제적 여건이 마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광기와 비슷한 거죠.
 
소양: , 그런 거죠. 저는 거기에 굉장히 공감했어요. 그런 면이 너무 좋다. 그런데 실제 만나기 전까지는 김언희가 어떤 사람일까 생각해본 적도 없어요.
 
브루넷: 이 정도 연배라는 건 아셨어요?
 
소양: 몰랐어요.
 
브루넷: 그 나이로 보이지도 않으실 것 같아요.
 
소양: 사실 너무 젊어 보여요. 오십대? 사십대? 하지만 그 사람의 개인적인 것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는 않아요.
 
브루넷: 본인이 밝히지 않는 이상 유추할 필요도 없고요.
 
소양: 두 시간 남짓한 그 시간동안 특이하고 사적이고 내밀한 얘기를 들려주셨어요. 그 얘기를 듣고 나니까 시도 다르게 읽히고 김언희 연구가 이뤄진다면 한 부분을 차지할 만한 얘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언젠가는 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어요. 그전까지는 손대기도, 입대기도 싫었어요. 이 상태로 완전하니까요. 하지만 생각을 해보니까 이 시가 정확하게 이해된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브루넷: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 너무 좋다!’ 말고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란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소양: 그래서 삼가게 되는데 언젠가는 해보고 싶어요. 김언희를 처음 읽었을 때도 충격이었지만 그게 어떤 충격이었는지에 대해서 제 안에서 정리가 필요한 것 같아요. 그게 왜 충격이었는지. 그게 뭐였는지.
 
브루넷: 충격을 안 받는 게 이상하죠. 취향은 확실히 많이 탈 것 같고.
 
소양: 어떤 사람들은 휙 보고 뭐야~ 이러고 말겠죠.
 
브루넷: 쉼보르스카 같은 타입은 전혀 아니니까요.
 
소양: 쉼보르스카는 진보적인 사람도 보수꼴통도 다 좋아할 수 있는 휴머니즘적이고 보편적인 아름다운 이야기를 쓰셨죠. 김정란 시인에 대해 얘기한 게 기억에 남아요. 페미니스트 시인한테 공격당했을 때(프랑스 무슨 대학 출신이라고 해서 김정란이구나 했어요) 반박할 생각은 안 드셨냐는 질문에, 프랑스 대학 나와서 교수님 하시는 분과 자신이 비교가 되겠느냐. 자기는 그냥 침묵했다.
 
브루넷: 김언희 시인이 절차탁마하고 노력도 하셨겠지만 저는 이런 시는 천재가 아니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솔직히 김정란 시는... 저희 때 여성주의 시인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저도 다 읽었지만 그다지 인상에 남지 않았어요. 김언희 같은 천재가 굳이 그와 비교하거나 논쟁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시로 이미 압도적인 재능 차이를 보여줬는데.
 
소양: 저도 김언희 정도 레벨이면 그런 건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아프죠. 같은 여성시인한테 비난받은 것은.
 
브루넷: 진주 촌년이라고 자조할 것까지는 없어 보인다.
 
소양: 김언희 시인이 그냥 유쾌하게 표현한 거죠. 뭣 하러 말 섞겠냐. 나는 작품으로 얘기 다 했다. 읽는 분들이 느끼면 된다. 내가 페미니스트인지 뭔지는 읽은 사람들이 판단하면 된다.
 
브루넷: 김언희 시인에 관한 글이 많이 나오면 좋겠어요.
 
소양: 올해 나오는 것 같아요. 어떤 기획이 나오는 것 같아요.
 
 
*아래는 현대시199712월호 대담의 한 대목입니다. 당시 실제 좌담회를 가졌던 것은 아니고 서면으로 주고받은 문답을 대화처럼 재구성했다고 합니다.
 
김정란: 시의 입장은 옹색해질 대로 옹색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생산되고 있습니다. 올해도 월간지 계간지들을 통해서 많은 시들이 발표되었고, 중견 시인들을 위시한 많은 시인들이 시집을 냈습니다. 우선 시단의 전체적인 동향부터 점검해 보도록 하죠. 올해 출판된 시집들을 살펴보면, 우선 눈에 띄는 현상이, 그 동안 출판사 별로 일정한 특징을 보였었는데, 그 특색이 많이 사라진 것같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문지 시선이나 창비 시선의 특색이 우선 많이 흐려졌습니다. 세계사 시인선은 그런대로 아직까지 어떤 색채를 고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만...이 점은 아마도 한국 문학의 현실적 여건과 어떤 연관이 있을 것처럼 생각됩니다. 이 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이야기를 나누어 보도록 하죠.
 
(중략)
 
김정란: 올해에 출간된 시집들을 일별해 보면, 신인들의 활약이 오히려 주춤한 상태에서 상대적으로 중견들의 시집 출간이 활발했던 것 같습니다. 정진규, 이승훈, 이시영, 마종기, 김형영, 정호승, 최승호, 김혜순, 안도현, 문충성 씨 등 중요한 시인들이 각각 시집을 출간했고, 시집이 나온 것은 아닙니다만, 강은교 씨도 그간 뜸했던 작업을 활발하게 재개하고 있습니다. 이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이 현상은 유하 씨나 하재봉 씨 등을 중심으로 한 포스트모더니즘 시가 주춤해 보이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남선생님께서는 출판 일선에 서계시니까, 정확한 감각을 가지고 계실 것 같은데...
 
남진우: 우리 문학이 그만큼 성숙했다는 징표의 하나겠지만 시단의 인적 구성이 굉장히 다양해지고 연령층 역시 두꺼워졌습니다. 위로 서정주, 구상 같은 원로부터 아래로 70년대젊은 시인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른 시대의 자장을 통과해온 시인들이 각개약진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중견시인들의 건재는 참 반가운 현상이지요. 그만큼 우리 시가 건강하게 약동하고 있다는 점을 일러주니까요.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행과 관련해 이야기하자면 지금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중견시인들 중 몇몇은 아직도 포스트모더니즘 신봉자의 대열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적으로 별로 신통한 결과물을 내놓지는 못한 것 같아요. 젊은 층의 경우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유행적 관심은 상당히 퇴조한 반면 서서히 내면화의 단계에 접어든 것처럼 보입니다. 앞으로의 작품이 기대됩니다.
 
(중략)
 
김정란: 같은 맥락에서 최근에 계속 얘기되고 있는 <>을 둘러싼 담론들 역시 저는 조금 불안하게 느껴지거든요. 김혜순 씨와 채호기 씨가 생산해 내고 있는 시들은 일정한 성취를 확보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만, 이 문제가 <여성 육체>에 관한 논의로 넘어오면, 굉장히 큰 혼란을 불러일으키거든요. 이를테면, 김언희 씨는 계속해서 엽기적인 방법으로 여성적 육체를 전시하는 작업에 매달려 있습니다. 이러한 시도가 시인 자신의 내적 추구와 연관되어 있는 의미있는 작업인지, 아니면, 역시 사회가 생산해내는 문화 유행 코드를 추수하는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희중: 개성적인 시인들의 시세계를 모아서 하나의 용어로 규정함으로써 잃는 것이 있을 듯합니다.
 
김정란: 어쩐지 대답을 회피하시는 것 같군요(웃음). 남선생님께선 어떠십니까?
 
남진우: 개인적으로 김언희의 시를 대단히 좋아합니다. '끔찍주의라고나 할까요. 그녀의 시는 고기와 뼈 그리고 점액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몸뚱어리를 가차 없이 해부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녀의 극렬한 언어는 읽는 사람의 인내심을 시험하면서 '인간의 죽음이란 고전적 주제를 환기시키는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물론 거기엔 수사적 과장이 곁들여지고 있습니다만, 그 과장조차도 일정한 시적 효과를 창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육체에 대한, 그리고 에 대한 어떠한 환상도 거부하고 있다는 점에 그녀 시의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있지요. 더 나아갈 수 있는 터널이 원천 봉쇄돼 있다고나 할까요. 그렇게 되면 남는 건 동어반복밖에 없는데 요즘 그녀의 시엔 그런 매너리즘의 흔적이 보여요. 그녀를 포함해서 이라는 테마에 열중하고 있는 시인들이 모두 부딪칠 수밖에 없는 한계지점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김정란: 이 부분에선 남선생님의 견해는 제 견해와 정면충돌하는 것 같습니다. 김언희 씨의 시는 제가 보기엔 문제가 많거든요.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하겠습니다. 우선, 그녀가 제시하는 육체 전시 방법은 여성에 의해서 여성 육체에 가해지는 성폭행이라고 불릴 만한 요소를 가지고 있어요. 좀더 심하게 말하자면, 시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강간이라고나 할까요. 가장 자극적인 방법으로 남성들의 가학충동을 만족시켜주고 있는 셈이지요. 남성을 대신해서 기꺼이 여성의 육체를 난도질해서 구경시켜주고, 그 몫을 문학적으로 챙기는 것이지요. 다음으로는 시인의 윤리적 태도 문제인데요, 그저 눈길만 끌어당겨서 자신의 몫만 챙기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참담한 점인데요. 남성시인들은 대체로 그녀의 시를 아주 좋아하거든요. 여성시인들은 거의 모두 진저리를 치고 말이죠.
 
인간과 육체에 대한 '환상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김언희 씨의 시야 말로 가학적 환상을 충족시켜주는 시라고 생각합니다. 육체는 조금도 신비스러울 것 없는 '거기 있는 부피이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그렇게 추악한 것일까요? 이 추악한 육체 전시 방법은 결국 육체에 대한 뒤집힌 환상에 불과합니다. 제가 김언희 씨의 시에서 문제 삼는 것은, 그것이 근본적으로 생에 대한 '증오에 의해 쓰여진다는 것이지요. 물론 '증오자체가 문제된다고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그것도 하나의 선택이니까요. 문제가 되는 것은, 시인 자신은 증오가 생산해내는 부정적 에너지로부터 너무나 얌체처럼 완전히 비켜서 있다는 것이지요. 증오의 흙탕물은 시인 자신에게 한 방울도 튀지 않습니다. 생을 담보로 하고 있지 않은 가짜 코드니까요.
 
그녀의 문학적 재주에 관해서는 어느 수준까지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아주 빤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약간의 재주를 가지고, 동시대의 여성시인들이 그토록 이해받지 못하며 힘들게 경작하고 있는 여성적 정체성이라는 돌짝밭의 개간 노력을 한꺼번에 초토화시킨다는 것은 일종의 문학적 파탄이지요. 남선생님처럼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나고, 문학적으로 진지한 태도를 견지해 온 분조차 '여성 육체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토록 무심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 평단의 현실인 것처럼 느껴져서 씁쓰레한 느낌이 드는군요.
 
얘기가 길어졌습니다. , 화제를 바꾸어 보죠. 앞에서 이승훈 시인의 작업을 놓고 얘기를 나누었는데, 정진규 시인의 작업 역시 언급할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정진규 시인과 최승호 시인의 시는 묶어서 언급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우선, 두 시인 모두 동양적 자연 회귀를 기조로 한 우화시들을 쓰고 있죠?
 
(후략)
 

*김언희의 시를 두고 김정란과 남진우 사이에 오간 공방에 관해 더 읽어보고 싶으신 분들은 조연정 평론가의 여성 시학, 1980~1990(문학과지성사, 2021)에 실린 그들의 페미니즘 -‘김정란 죽이기김정란 구하기를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아래는 그 글에서 발췌했습니다.
 
남진우는, 자신의 발언 뒤에 사후적으로 붙은 김정란의 비판은 답변자에게 재반박의 기회를 주지 않은 지극히 비열한” “뒤통수 때리기에 가깝다고 지적한다. 그를 불쾌하게 만든 것은 비판의 내용이기 이전에 지면상으로자신이 김정란의 극렬한 발언에 아무런 항변도 하지 못한 순한 양이 되어버린 장면 그 자체이기도 했던 셈이다.”
 
여성의 육체가 즉물적으로 재현되는 과정에서 그것이 타자의 육체에 대한 폭력적 대상화인지 혹은 여성 육체의 가시화라는 자기수행적 행위의 실현인지를 우리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그것이 단순히 시인의 성별 혹은 시적 화자의 성적 정체성을 확인함으로써 구분될 수 있는 문제일까(당연히 아닐 것이다). 나아가 시라는 장르의 속성상 전시되는 육체를 둘러싼 욕망의 관계가 상세히 분석될 수 없을 경우, 간혹 부분적인 육체의 전시 자체만이 강조되는 문제적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김언희의 시를 여성에 의해 가해지는 여성 육체에 대한 성폭행이라고 지적할 때 그러한 비판적 시선이 오히려 김정란이 품고 있던 남성적 시각의 한계를 확인시켜준 것일 수도 있겠으나, 시인의 성별과 무관하게, 그리고 담론화한 육체성의 범위를 넘어, ‘전시된 육체의 긍정적·부정적 효과에 대해 토론할 기회를 그녀가 마련해본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진우의 글은 김정란의 비판을 의미 있는 토론으로 확장하지 않는다. 김정란의 태도에 대한 비판을 경유해 결국 페미니즘 비평 자체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해버린다.”
 
 
 
9. 하야시 후미코
 
브루넷: 이 작가는 어떤 작가예요?
 
소양: 하야시 후미코라는 일본 쇼와를 대표하는 여성 작가예요. 이 책(방랑기)은 일기 형식의 책인데 읽어 보면 이게 소설인가? 그냥 일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야시 후미코는 저한테 어떤 전형이에요. 젊고 가난하고 재능 있지만 너무 배고픈. 허기를 항상 느끼는 여성작가의 전형 같아요. 처음 읽었을 때는 마치 트위터를 읽는 것 같다고 느꼈어요. 내 친구들의 트위터를 읽는 것 같다. 내가 친구라고 느끼는 사람들의 트위터 타임라인을 읽는 것 같았어요. 자기는 방랑의 숙명을 타고 났다고 적었어요. 새아버지가 가장으로서의 능력이 없는 남자여서 하야시 후미코는 엄마와 새아버지와 함께 어려서부터 행상하고 되는 대로 떠돌아다니며 살았어요. 온갖 일을 하면서도 나는 시인도 되고 싶고 소설도 쓰고 싶고 뭣도 써보고 싶다고. 하지만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 위한 일을 해야 됐죠. 방랑기에서 일의 고됨도 말하지만 무엇보다 허기에 대해 계속 얘기해요. 뭐 좀 먹었으면 좋겠다고 구체적으로 나와요. 소바를 먹었으면 좋겠다, 우메보시를 먹고 싶다, 붕어빵을 먹고 싶다. 흰 쌀 밥 한 공기만 먹었으면 좋겠다. 이런 얘기가 계속 나와요. 남자 얘기도 나와요. ‘사람이 너무 그립다’ ‘헤어진 남자가 그립다’. 굉장히 원초적으로 보고 싶은 마음을 써요. 읽어 보면 다 쓰레기 같은 남자들이에요. 부인도 있고 이 남자들 때문에 죽도록 고생을 하는데도 사람이 그립다고 해요. 중간 중간 자기가 쓴 듯한 시도 나와요. 오늘 이런 시를 써서 어디 부쳤다. 오늘은 동화 한 편을 부쳤다. 이 동화가 팔려서 돈이 됐으면 좋겠다. 오늘은 배가 고파서 무슨 책을 팔아 그 돈으로 바꿔 먹었다. 체홉의 뭘 읽었는데 너무 좋다.
 
브루넷: 아까 잠시 펼쳐 봤는데 벚꽃동산얘기도 나오더라고요.
 
소양: 방랑기가 영화화도 되었거든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하야시 후미코 소설이 원작인 영화들을 상영해줘서 봤는데, 소설 속 카페를 지금으로 치면 여자 나오는 술집 느낌으로 연출했더라고요. 밝고 왁자지껄한 분위기로. 여자주인공이 그런 카페 여급으로 일하는데 손님 없을 때 윗층에 올라가서 공부를 하다 혼났다. 공부할 시간이 좀 났으면 좋겠다고 써요. 그런 조건에서도 악착같이 써요. 이걸로 돈이 벌렸으면 좋겠다. 방랑기는 그런 내용이에요. 인터뷰를 앞두고 이 책을 다시 읽어봤는데 엄청 새로워요. 그전에 뭘 읽었는지 하나도 기억 안 나고. 하하. 그런데 일기 형식이기 때문에 어떤 페이지를 펼쳐서 읽어봐도 바로 진입이 가능해요. 남자 이야기. 그리고 일하면서 만나는 여자들 이야기. 자기랑 비슷하게 취약하고 돈 없고 뭐 그런 여자들 이야기를 하죠. 모슬린 숄을 하나 샀으면 좋겠다. 내 남루한 행색. 길거리 지나가는 여자들 정말 예쁘게 입었다. 난 정말 인물이 없다. 이런 식으로. 저는 하야시 후미코가 정말 좋아요.
 
브루넷: 살아 생전에 성공했나요?
 
소양: . “쇼와를 대표하는소설가가 됐어요. 방랑기가 당대에 굉장한 인기를 끌어서 드라마, 영화, 연극으로 제작이 됐대요. 우리 모임의 준 님께서 좋아하시는 나루세 미키오가 하야시 후미코의 소설을 여러 편 영화화 했어요. 제가 알기로 여섯 편인가 돼요. 방랑기도 있고 부운도 유명해요. 그리고 만국이라는 것도 있어요. 만개한 국화라는 뜻인데 예쁘게 만개한 게 아니라 만개를 넘어-
 
브루넷: 시들 일 밖에 남지 않은?
 
소양: . 은퇴한 게이샤가 옛 동료들한테 치사하게 굴면서까지 악착 같이 돈을 모아요. 그러다 옛날 남자도 만나지만 젊은 시절의 사랑은 다 지나간 옛일이고 뭐 그런 얘기에요. 이번에 부운도 보고 방랑기도 봤는데 여배우가 같았어요. 다카미네 히데코 있잖아요.
 
브루넷: 예쁜 분.
 
소양: 너무 미인이잖아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 작가가 자기 인물 없음에 대한 얘기를 계속 썼는데 이렇게 대놓고 아름다운, 당대를 대표하는 미녀배우를 캐스팅한 건 좀 너무하다고 생각했어요. 이입이 덜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그 배우가 연기를 잘해서 나중에는 괜찮았어요.
 
브루넷: 책날개에 실린 사진 보니까 작가도 미인인데요?
 
소양: 하지만 이 배우는 누가 봐도 너무 미인이잖아요. 하야시 후미코는 자기의 남루함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한단 말예요. 실제로 인물이 없지 않아도 남루한 일상 때문에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각할 수 있잖아요. 저는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렇다고 생각해요. 다들 그렇게 못나지도 않았어. 현실이 남루한 거지. 아무튼 그건 영화니까 소설의 어떤 에피소드만 취하고 있는데 영화에서는 방랑기밖으로 나와서 하야시 후미코가 성공한 다음의 이야기도 보여줘요. 거기서 처음 알았어요. , 하야시 후미코가 나중에 성공도 정말 했구나. 영상화해줘서 알았어요. 방랑기는 나루세 미키오 영화 중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좋아하는 영화일 거예요. 훌륭하게 찍은 영화지만 소설과는 별개의 작품이라고 느꼈어요. 기왕 하야시 후미코 영화들을 본 김에 소설도 읽자 하고 부운도 읽었어요.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 부운도 아주 유명하고 또 멜로영화라고 해서 굉장히 농염하고 에로틱할 줄 알았는데 소설을 읽어보니 그런 내용이 아니었어요. 베트남에서 만난 두 남녀가 패전 후 일본으로 귀환해서 헤어질듯 헤어지지 못하는 걸 굉장히 긴 이야기로, 지겨울 정도로 긴 이야기로 하는데 그 영화도 좋았어요. 정말 진이 다 빠지더라고요. 헤어질 듯 헤어지지 않고 여자가 남자를 계속 붙잡아요. 하야시 후미코 작품에서 제가 좋아하는 게 그거 같아요. 이 여자들이 지금 시각으로 보면 굉장히 형편없는 남자들을 사랑하는데 씩씩하게도 사랑을 해요. 지치지도 않고 사랑을 해요. 남자한테 계속 버림받고 남자가 형편없이 구는데도 사랑을 해요. 하야시 후미코 자체도 그렇고 부운도 그런 느낌인데, 여자가 남자를 정말 사랑하고 살림도 꾸리고 싶어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남자한테 기대 사는 건 정말 싫어! 라는 게 있어요. 남자가 나를 등쳐먹는다면 내가 죽도록 벌어서 이 남자의 살림을 해줄지언정. 그런 악착같은 게 있어요. 요즘 남미새라는 말 쓰잖아요. ‘남자에 미친 새끼라는 말이더라고요. 남자 좋아한다는 게 요새는 이성애자 여자들 사이에서도 흠으로 여겨지고 욕으로 쓰는 분위기가 있는데 저는 일본문학에 나오는 이런 여성 캐릭터들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상처도 받지만 씩씩하게 남자를 좋아해요.
 
브루넷: 전통적으로 여자가 고생하는 얘기인 것 같았는데 이런 면이 있는 얘기였구나.
 
소양: 굉장히 강한 힘이 있어요.
 
브루넷: 서사만 보면 여자가 불쌍한 것 같지만 사실은-
 
소양: 그 여자는 마지막에 남자를 자기 손에 넣은 거예요.
 
브루넷: 박찬욱 감독이 나루세 미키오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네요.
 
소양: 제가 일본영화사를 잘은 모르지만 그 감독 있잖아요. 다다미 씬 잘 찍는.
 
브루넷: 오즈 야스지로.
 
소양: 오즈 야스지로와 비교하면 나루세 미키오는 페미니스트예요.
 
브루넷: 겉으로 보면 전통적인 여자를 그린 것 같지만. 그래, 맞아. 준 님이 오즈 야스지로 안 좋아하세요.
 
소양: 오즈 야스지로는 영화 보면 정말 보수적이에요.
 
브루넷: 저는 오즈 야스지로 좋아했어요. 정갈한 느낌?
 
소양: 정갈하죠.
 
브루넷: 여배우 너무 예쁘고.
 
소양: 예쁘죠. 나루세 미키오의 여자들은 굉장히 강해요. 그리고 여자들 삶을 직시했어요. 오즈 야스지로가 자기는 절대로 나루세 미키오처럼 못 찍는다고 했대요. 당연히 못 찍겠지.
 
브루넷: 오즈 야스지로는 훨씬 미화된 세계를 그렸어요. 사실은 왜곡된 세계죠.
 
(한성대입구역 백반집 토속집으로 자리 이동)
 
브루넷: 여기 불고기는 무채를 넣어서 감칠맛을 낸 게 독특해요.
 
소양: 뚝배기불고기는 제가 평소 시도하는 메뉴는 아닌데 제 생각보다 훨씬 취향에 맞아요.
 
브루넷: 소양 님이 좋아하는 여성작가가 준 님이 좋아하는 나루세 미키오와 연결될 줄은 몰랐어요.
 
소양: 옛날 일본에 대한 동경이 좀 있어요. 이번에 설국도 봤는데 설국도 다른 의미로 정말 대단했어요. 트위터로 알게 된 트친이 있어요. 소설 원작 있는 영화들을 상영하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혹시 좋아하면 같이 보러 가자고 했더니, 자기가 설국을 읽었다며 설국을 보쟤요. 설국영화가 과연 괜찮을까? 의구심이 있었지만 저도 한 번은 볼 생각이라서 보러 갔는데... 설국이 대단한 내용이 있는 소설이 아니잖아요. 읽어보셨어요?
 
브루넷: 저희 어릴 때는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라고 많이 팔렸죠. 권장도서로도 읽히고. 엄청 탐미적이고 아름답다고 하는데 저는 진짜 안 맞더라고요. 끝까지 못 읽었어요.
 
소양: 내용이 별로 없잖아요. 오리엔탈 환상을 판 거죠.
 
브루넷: 그 환상이 없는 한국여자애는 도저히 읽을 수가 없더라고요. 그렇다고 이성애자 여자애를 만족시켜 주는 얘기도 아니고.
 
소양: 사실 너무 이상한 얘기죠. 한국영상자료원은 관람료가 무료니까 관객들이 다양한데 틀어주는 영화에 따라 관객연령대가 달라요. 어떤 회차는 아저씨, 할아버지가 많고 어떤 회차는 젊은 여자들이 많아요. 설국은 나루세 미키오 영화보다 할아버지 관객이 많았어요.
 
브루넷: 설국은 확실히 남자들한테 소구하는 작품 같아요.
 
소양: . 그래서 웃기다 하고 들어갔어요. 저희 옆에 배불뚝이 아저씨가 앉으셨는데 동행한 여자 분이 그 쪽을 자꾸 쳐다보길래 저는 그 아저씨가 혹시 자위를 하나 했어요.
 
브루넷: 그럴 장면이 있는 영화예요?
 
소양: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기본적으로 게이샤 영화니까. 그 영화를 요약하자면 게이샤 구경이죠. 료칸에서 일하는 온천 게이샤 환상에 대한 영화기 때문에. 그런데 그게 아니라 그 아저씨가 계속 코를 골아서 이 분이 신경 쓰셨던 거예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조마조마해하면서 봤어요. 이게 소설로 볼 때는, 예를 들어 유코라는 인물이 소설로 보면 그냥 어떤 여자가 왔다 갔다 하나보다 하는데 그걸 영화로 시각화하면-
 
브루넷: 성적 대상화가 심하던가요?
 
소양: , 게이샤 복장을 하고 있고 그 움직임도요. 게이샤의 움직임이라는 게 있잖아요. 나긋나긋한. 그 모든 맥락들도요. 화자가 이 여자를 재회하는 장면에서 이 손가락이 너를 기억하고 있지라는 대사가 있어요. 맞아. 그런 대사가 있었지. 소설로 읽을 때도 묘하다는 인상을 받긴 했는데 영화는 그걸 실제로 보여줘요. 여자가 남자 손가락을 물어요. 돌겠다. 이게 뭐지?
 
브루넷: 원작이 그런 요소들을 다 갖고 있었을 거예요. 그래서 남성 평론가들이 좋아했고.
 
소양: 그래서 팔린 거죠. 노벨 문학상까지 타고. 예를 들어 만약에 내가 프랑스 백인 남자야. 그런데 일본의 신비로운 여성 예술가인 게이샤. 어떤 온천에 가면 술 마시면서 게이샤를 부를 수 있어. 그들이 반드시 성 판매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과 잘 사귀면 그럴 수도 있어. 21세기 한국을 살아가는 한국여자로서 한국남자들의 식민지 남성성에 대한 성토를 듣게 되잖아요. 한국남자들이 얼마나 비겁하고 못났는지에 대해. 그런데 옛날 일본 영화를 보니까 일본남자의 비겁함도 만만치 않아요. 사람들이 요즘 슬램덩크얘기하면서 왜 그런 괜찮은 남자들은 다 멸종이냐고 하는데 멸종이 아니라 원래 남자라는 것은, 물론 이건 다 재현물들이지만, 참 비겁하고 너무 이상해요. 그런 걸 보다 보면 여자들에 대한 존경이 생겨요. 그런데도 남자들을 사랑할 수 있어. 남자가 형편없어도 그 사랑하는 마음은 여자의 것이잖아요.
 
브루넷: 요새는 한국남자를 사랑하는 여자를 모자란 사람처럼 보는 분위기지만 사실 사랑하는 마음은 나의 것이죠.
 
소양: 맞아요. 사랑하는 마음의 일부는 남자한테서 왔을 수도 있지만 그 감정은 기본적으로 여자의 것이에요.
 
브루넷: 비난받을 일이 아니에요.
 
소양: ‘멘헤라라는 말 있잖아요.
 
브루넷: 멘헤라가 무슨 뜻이에요?
 
소양: 정신적으로 취약한 동시에 남자한테 집착하고 의존하는 여자애들을 가리키는 일본의 인터넷 신조어예요. 남미새, 멘헤라 같은 말들을 써가며 그런 여자들을 비웃는 사람들보다 차라리 남미새, 멘헤라가 낫지 않나? 남자를 폄하하는 표현도 많죠. 남자를 뭐라 부르건 간에 자기 마음이겠지만 저는 오히려 남자 겨드랑이에 코 박고 죽고 싶어 하는 멘헤라가 훨씬 솔직하고 더 강하지 않나 싶어요. 자기 욕망을 직시하잖아요. 욕망에 충실하고요. 저는 그런 여자들이 더 좋아요. 제가 더 관심 있고 응원하는 건 그런 쪽이에요. 제가 읽고 싶은 얘기도 그런 솔직함에 대한 얘기고. 이러니까 문학할 때 힘들었죠.
 
브루넷: 왜요? 문학은 그런 걸 지지하지 않아요?
 
소양: 제가 읽고 싶은 문학이 충분하지 않았어요. 설국얘기로 돌아가면, 영화가 너무 지겹게 길었어요. 게이샤 구경하러 온 할아버지들이 어이구, 지겨웠다하면서 나가는데 웃겼어요. 쌤통이다. 너 게이샤 구경하러 왔지? 실컷 했지? 너무 했지? 너무 보여주니까 나중에는 질려요. 게이샤가 조금만 살랑거렸어야 되는데 너무 길게 그러니까 이 남자관객들이 지겨워 죽으려는 거예요. 다들 코 골고. 그런데 그 영화에 딱 하나 좋은 장면도 있었어요. 소설에서는 어떻게 묘사되는지 모르겠지만 중간에 이런 장면이 나와요. 주인공 여자가 원래는 게이샤가 아니라 샤미센 연주자가 되려고 샤미센을 배웠는데 샤미센 선생님도 아프고 그 사람의 아들도 병이 들어서 암묵적으로 스승을 위해 자기희생해서 게이샤가 된 여자예요. 자기는 스승한테 보답하기 위해 팔렸다, 그리고 이렇게 주저앉았다고 얘기해요. 영화 중간쯤 가면 주인공 남자가 샤미센 연주 좀 해주지 그래?’ 해서 여자가 연주를 시작해요. 연주를 잠깐 보여주는 게 아니라 꽤 길게 보여줘요. 저는 샤미센에 대해, 그 악기가 어떻게 소리 나는지는 잘 모르지만 이해 이전에 너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가 남자는 방을 나가버리고 그 남자를 따라 카메라가 따라 나가는데 그 온천에 여자 맹인안마사가 있어요. 그 맹인안마사가 누구누구가 샤미센을 켜는 소리군요. 저는 들으면 다 알 수 있지요라고 말해요. 오늘 연주가 슬프게 들린다면서 그 남자는 그냥 가버리고 맹인안마사가 벽을 짚으면서 그 음악을 듣는 걸 보여줘요. 그리고 샤미센 연주하던 여자는 연주를 마치고 울면서 , 나는 오늘 샤미센을 연주했는데 그 소리가 너무 좋았어. 너무 좋았어.’라고 해요. 그 장면이 너무 좋아서 유투브로 찾아봤는데 없어서 아, 이런 건 일생에 한 번만 볼 수 있는 건가 보다 했어요. 그 영화를 두 번은 견디기 힘들 수도 있고. 하지만 만약 그 영화가 어디선가 한다면 그 샤미센 장면 때문에 또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브루넷: 남자와 무관한 장면 같네요.
 
소양: , 이 여자의 결기 같은 걸 보여줬어요.
 
브루넷: 그걸 여성 맹인안마사가 공명하고.
 
소양: 이것도 소설에 나왔는지는 모르겠는데, 다른 마을에 있는 게이샤 언니와 얘기를 해요. 주인공 여자는 화자로부터 사실상 버림받은 상태로 잘 될 가능성이 희박한 상태인데 이 언니는 좋은 후원자를 만나서 어디에 가게를 차리기로 했대요. 노후 걱정이 없는 거죠. 그런데 그 후원자가 갑자기 죽나 그래서 그게 좌절돼요. 그런 식으로 이 여자들이 어떻게 됐나를 후일담 식으로 좀 더 보여줘요. 여성주의라고 하기에는 너무 이상한 영화고 볼 때도 힘들었지만 보고 나니까 그래도 괜찮은 관람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브루넷: 현실을 간파하는 눈이 있으면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도 여성의 삶을 아는 것 같아요. 체홉도 페미니스트는 아닐 텐데 여자들의 절망을 잘 그렸잖아요.
 
 
10. 미래는 어둡고, 나는 그것이 미래로서는 최선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브루넷: 다질 님이 주신 질문은 미래에 관해 거예요.
 
소양: 제가 요즘 옛날 생각을 많이 하고 사는데 거기서 꺼내주려고 그러나?
 
브루넷: 과거가 그리우세요?
 
소양: 그립기도 하고 갇혀 있는 것이기도 하고. 과거 일들을 계속 생각하는 거죠.
 
브루넷: 오늘 얘기 나누면서 소양 님이 과거에 갇혀있다는 생각은 안 들었어요. 오히려 힘든 일이 있었을 걸로 짐작되는데도 불구하고 의연해보여 의아하달까요.
 
소양: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그래요. 제가 예고 출신인 걸 말하기 싫어하는 것은 문학하는 사람들이 누가 어디 출신이라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문단 내 성폭력 이후에 내가 그 학교 졸업생이라는 것을 사람들한테 뭐라고 얘기해야 될지, 여러 맥락이 있는데 그걸 어떻게 전달할지 모르겠기 때문이에요. 저는 예고 문창과 동문들이 냈던 성명서에 서명 안 했어요.
 
브루넷: 왜요?
 
소양: 그 안에서 일어난 갈등을 다 지켜봤는데 거기에 동의할 수 없었어요. 동문의 이름으로 뭔가를 게시할 때는 동문들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고 가급적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방향으로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브루넷: 결과적으로 B는 사회적으로 매장됐잖아요. 노선갈등에도 불구하고 그 성명서가 기여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소양: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지만 그 과정은 별로 여성주의적이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지금 생각하면 문단 내 성폭력을 해결하려는 의욕이 컸던 것 같아요. 활동가로서 성폭력 사건을 해결하고 싶다는. , 미래에 대해 얘기 중이었죠. 리베카 솔닛이 인용한 울프에 따르면, 미래는 분명히 어두울 텐데 그것이 미래로서는 최선이었을 거래요. 미래라는 건 그런 것 아닐까요?
 
브루넷: 구체적으로 염두에 두신 미래가 있으세요?
 
소양: 제 삶이 어느 정도는 이미 결정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살아온 궤적이 있기 때문에 그대로 살면 된다.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건 그 정도예요. 바뀔 수도 있겠죠. 어쨌든지 간에 저는 지금까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았어요. 정말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았죠. 앞으로도 할 수 있는 선에서 그러면 되지 않나. 복잡하게 생각 안 하기로 했어요. 복잡하게 생각할 일이 너무 많아서 미래까지 그러고 싶지 않아요. 최근 저희 학과에 새로 들어오신 분들 보면서, 그리고 이제 막 문학을 시작하신 분들을 보면서 좋은 의미로 충격 받았어요. 저는 지치거나 이미 좀 둔해졌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문단 내 성폭력이라고 해도 저는 이제 마음이 별로 안 아파요. 거기에 대해서는 그때 생각을 너무 많이 했고 사실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을 보면서 무감해진 면도 있어요. 문단 내 성폭력으로 인해서 제가 알게 된 것은... 우선 피해자의 고통이 있죠. 그리고 왜 문단 내 성폭력이 일어나는지, 성폭력을 일어나게 만드는 환경이 있죠. 그런데 성폭력이 일어나고 난 후에는 공동체가 와해돼요. 그리고 이걸 잘 해결해보겠다고 모인 여성연대가 와해돼요. 저는 그걸 계속 겪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도. 그게 문단 내 성폭력 이후 제가 겪고 있는 일 같아요. 이것에 대해 여자들이 생각을 많이 하기 때문에, 너무 생각을 많이 한 여자들이 서로 다른 생각 때문에, 그 일이 없었다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관계가 달라져버려요. 관계가 상실이 돼요. 어떤 의미에서는 이게 페미니스트들이 겪는 일인 것 같아요. , 사회운동가들이 겪는 일이겠죠. 페미니스트들만 그런 게 아니라. 그런데 페미니스트의 삶은 여자들과의 관계가 정말 강렬하고 중요하기 때문에 그만큼 상실했을 때의 고통도 크죠. 다질이 저한테 미래에 대한 질문을 던진 것은 저를 그 고통에서 꺼내주려 함이 아닐까. 나한테 뭘 말하게 하고 싶은 걸까. 그만 생각해. 이런 거겠죠. 앞으로도 그런 일들은 계속 될 거라고 생각해요. 어떤 것에 연대하기로 했고 좋은 의도로 어떤 활동에 참여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그 활동이 안 좋게 될 수도 있어요. 페미니스트들이 하는 활동은 대부분 안 좋게 돼요. 연대에 책임을 져야 된다는 말은 그런 상황에 관한 얘기예요.
 
브루넷: 실패하기 쉽죠. 여자들은 사회적 자본이 부족하고 지지기반도 약하니까.
 
소양: 계속 실망하겠죠. 그걸 감당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 같아요. 미래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말고. 지금까지 대체로 행복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럴 거라 생각하면서.
 
(<토속집> 맞은편 <헌술방>으로 이동)
 
 
11. 우정
 
브루넷: 요즘 어떻게 지내셨어요?
 
소양: 작년 하반기에 힘들었어요. 정말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도 했어요. 하반기에 무너졌던 것 같아요. 어떤 자리를 가야 되는데 거기서 인간 형상으로 존재할 자신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충 옷을 입고 사회적인 가면을 쓰고 거기 존재만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갔어요. 가면 좋아요. 막상 가면 페미니스트들 만나고 좋은 얘기 듣고. 가면 나아진다는 걸 아는데 가기 전까지 너무 힘든 거죠. 그래서 그냥 존재를 하자. 오늘은 존재하기가 목표. 더 이상 그렇게는 안 돼 하고 1월에는 공부 열심히 했어요. 생활습관도 조절하고. 계속 공부할 거면 몸을 만들어야 한다. 그럴 때가 됐다는 마음으로 1월을 열심히 보냈는데 2월에 어떤 일이 생겨서 갑자기 과거의 망령들이 귀환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지금은 3월 개강 앞두고 준비하느라 바빴어요.
 
브루넷: 과거의 망령을 소환한 트리거는 뭐였어요?
 
소양: 이 부분은 녹음을 멈추는 게 좋겠어요.
 
브루넷: .
 
브루넷: 우정에 관해 얘기해볼까요?
 
소양: 우정이요? 저는 우정 때문에 살고 친구들 때문에 하죠. 저한테는 사람들이 정말 중요해요.
 
브루넷: 그래서 상처도 깊이 받으시는 것 같아요.
 
소양: 전에 어떤 수업에서 이 수업에 기대하는 점이나 자신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에 관해 학기 첫날에 써오라고 했어요.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 생각하다가 저는 친구들이라고 적었어요. 어떤 사람들한테 대학원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닐 수도 있을 거예요. 어떤 단계나 거쳐 가는 곳에 불과할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여성학과에 오는 대부분은 실존적 선택으로서 와요. 결과적으로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나갈 때 어떻게 바뀔지는 몰라도 들어올 때는 내 인생의 무언가를 해결하고 싶다거나 여성인권을 알고 싶고 기여를 하고 싶다거나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마음으로 들어와요.
 
브루넷: 소양도 그렇잖아요.
 
소양: 그렇죠. 저도 그런 사람이죠.
 
브루넷: 그건 좋은 거네요.
 
소양: 제가 그동안 약간은 지쳤거나 약간은 소강상태에 있었던가 봐요. 어떤 위기 같은 것도 감지됐어요. 대학원생 일이 그런 거기도 하죠. 연구자들이 하는 것. 희망을 찾기도 하지만 위기 진단도 많이 하잖아요. 뭐가 위기인지 항상 생각해요. 그런데 최근 들어 어디선가는 무엇인가 새로 시작된다는 걸 보게 됐어요. 그게 희망이라면 희망이고 미래에 걸어볼만한 것인 것 같아요. 내가 모르는 어떤 것들이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계속 시작되고 있다. 저희 학과에 세 사람의 새로운 동료가 들어온 것을 보고 대학원 동기들이 생각이 많아졌어요. 이 분들에게 여성학과 대학원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우리는 모르고 겪었거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것에 대해 곤란을 덜 겪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브루넷: 각자 당면한 공부만으로도 버겁지 않아요?
 
소양: 그런데 이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면 뭐 하러 여성학을 공부하죠? 여성주의적으로 살지 않으면 그 공부에 무슨 의미가 있죠? 인생이 원래 각자 헤매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덜 헤맸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잘 지낼 수 있을까. 어떻게 같이 어쨌든, 한 학기라도, 좋은 동료가 될 수 있지? 저는 그런 고민 하는 동료가 있어서 좋아요. 어떤 사람들에게는 과한 고민일 수도 있죠. 대학원이 누군가에게는 그냥 지나치는 곳일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이번에 들어온 신입생 분들 다들 끓는 마음으로 들어온 걸 보니까 걱정도 되고. 어떡하지 하는 마음도 들어요. 어떤 면에서는 걱정 때문에 하는 거죠. 이건 저에 대해 얘기하는 거예요. 걱정 때문에 할 때도 있다. 그런데 이 걱정을 안 하기보다는 그냥 걱정하면서 전전긍긍하면서 살지 뭐. 그렇게 생각하게 됐어요. 전전긍긍하고 살지 뭐. 전전긍긍하고 살면서 좋은 거 많았어. 나는 그런 사람이지.
 
브루넷: 이건 다른 얘긴데 저는 한국사회가 양성한 한녀 마인드맵을 잘 따라갔어요. 남자와 연애하고 아이도 낳고. 상당히 남편한테 목을 매고. 남편을 헌신적으로 사랑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남자 생각, 남편 생각을 너무 많이 했어요. 남편이 내 생각을 하는 것에 비해. 한국이 주는 미디어 컨텐츠나 여러 먹이를 잘 먹고 자라 그렇게 됐어요.
 
소양: 아내라는 위치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브루넷: 아내라는 위치에 안 갈 수도 있죠. 제 세대 여성들 중에는 비혼, 미혼, 이혼 많아요.
 
소양: 하지만 가게 된다면, 나는 그렇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여자들도 그렇게 될 것 같아요.
 
브루넷: 안 그런 여자들도 많아요. 남편한테 목 안 매고 여자들과의 관계를 가꾸고 사는 여자도 많아요. 저희 세대 남자들이 뭐 얼마나 가정에 헌신하고 아내를 사랑했겠어요. 제가 울산에서 만난 여자들. 울산은 공장 교대근무자가 많아요.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여자를 가부장적으로 대하는 남자들. 자기 잘 때는 집에서 청소기도 못 돌리게 하는 남자들. 아빠 잘 동안 엄마가 애 업고 밖에 나가 있는 동네. 여자들끼리 어느 집에 모여서 종일 같이 지내는 경우도 곧잘 있었어요. 남편은 그야말로 기능적인 존재고 인간으로서 느끼는 따뜻한 감정이나 연대는 여자들끼리 나누고 사는 거죠페미니즘의 ㅍ자도 꺼내지 않고 그런 거 관심도 없지만 여자들끼리 재밌게 음식 만들어 먹고 여행 다니고 애 기르는 공동체가 있었고, 크고 작은 그런 여성집단들 덕분에 한국의 기혼여성들이 재해 같은 한남들을 견디고 버텨왔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저는 그게 잘 안 됐어요. 연고 없는 곳이기도 했고 제 성격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남편과 해결을 보려고 했어요. 그러다보니 정서적 지지 기반 없이 고립된 상태가 오래 지속되었어요. 정신적으로 무척 황폐했죠. 그나마 썩은 동아줄처럼 남편과의 관계를 붙잡고 살았는데 그것마다 놓았을 때 나는... 결국 부부관계가 완전히 와해돼서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을 때 그때 나를 지탱해주었던 게 그전까지 내가 별로 가치를 두지 않았던 우정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질문지에 우정도 집어넣어 봤어요.
 
소양: 저는 우정 때문에 살아요.
 
브루넷: 예전에 저는 남녀 로맨스에 몰입을 많이 했어요. 사랑하는 남녀가 이어지지 않고 파국에 이르잖아요? 그럼 비극으로 인식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게 더 안전하고 오히려 더 행복한 결말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소양: 환상이 깨진 것이.
 
브루넷: 아니, 그게 더 실제로 오래 남을 수 있어서. 로맨스의 실체는 너무 고통스럽고 대부분 망하죠. 소양의 연애가 고통스러워 보이지는 않지만 결혼하고 이어졌을 때는 말예요. 이어지지 않고 우정으로 남은 남녀사이는 좋은 거다. 동성 간의 우정도 그렇고. 그래서 옛날부터 많은 작가들이 우정을 소중히 여기고 글을 썼구나. 그렇구나. 나는 사실 그런 여자가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나는 남자를 원하고 로맨스가 필요하다고만 생각했어요.
 
소양: 로맨스를 잘할 수 있는 남자가 별로 없어요. 사랑의 능력이 없어요.

브루넷: 우정이라는 게 점점 각별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소양: 어떨 때는 우정도 로맨틱해요.
 
브루넷: 소양 님은 친구가 많은 편이세요? 만나는 사람한테마다 진심을 보이고 진심으로 대하고 아끼고 웬만하면 손절하지 않으시죠?
 
소양: 보통 사람들은 좀 안 맞으면 안 보지 뭐 한다는 게 아직도 충격적이에요.
 
브루넷: 트위터에 흔한 풍토잖아요. 좀 안 맞으면 바로 차단.
 
소양: 충격이에요. 저는 어떤 그룹에서 다 같이 친구일 때가 많은데 그룹 안에서도 안 맞는 사람들이 있죠. 그럴 때 전 노력 많이 해요. 요즘에는 좀 내려놨어요. 시간이 없어서.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그럴 때 안 본다고 해서 아... , 저는 제가 이런 사람이란 걸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브루넷: 저는 옛날 사람이지만 차단 진짜 많이 하거든요. 트위터에서 제가 차단한 계정이 십만 개가 넘어요. 조금만 거슬리면 내가 트위터에서까지 이런 말을 봐야 하나 바로 차단해요.
 
소양: 저는 뮤트해요. 싫어서 뮤트 해놓고 또 한 번씩 들어가서 봐요. 변태죠.
 
브루넷: 저는 차단을 너무 많이 해서 내 트친이 친근하게 대화 나누고 있는 상대가 안 보이는 경우가 많아요. 좀 미안하다 싶어요. 이 사람은 나랑 말 한 마디 안 섞었는데 그냥 차단당한 거야.
 
소양: 트위터는 자기 마음대로 운영하는 거잖아요. 그게 꼭 자아도 아니고. 그런데 저는 그게 제 본체예요. 대학원 동기와 신입생들께 제 트위터 계정을 알려줬더니 소양은 저게 본체인 것 같다고. 별로 안 달라. 똑같은 것 같아 하더라고요.
 
브루넷: 저는 어땠어요? 달랐나요?
 
소양: 보통 저는 사람들 만나면 트위터보다는 실제 사람 만날 때 훨씬 좋아요. 더 많은 면들을 보게 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정말 그래요. 실제로 봤을 때가 훨씬 좋죠.
 
브루넷: 나는 온라인 상 자아를 따로 둔다는 게-
 
소양: 그래 본 적 없으시죠.
 
브루넷: 그럴 에너지가 있다는 게 놀라워요.
 
소양: 그것도 스타일 따라 달라요. 브루넷 계정은 멋진 보석 같은 계정이죠. 엄청 재밌고.
 
브루넷: 상태 안 좋았을 때 별의별 트윗을 다 했는데 지금 회복된 상태로 그때 쓴 걸 어쩌다 보면 황급히 삭제해요. 그딴 트윗들을 보고도 계속 팔로우를 유지해줬다는 게 뭐랄까. 이게 우정인가?
 
소양: 저는 그 트윗들이 사람의 단면처럼 느껴졌어요. 잘려 있다는 면에서. 이 사람의 생살이구나. 제 생각에는 트친이 이상한 말 해도 좀 못 본 척 해주는 게 트위터 매너 같아요. 오늘 아침에 본 건데, 트친들이 귀신같아서 자신한테 정신병이 오면 반응 안 하다가 자기 상태가 좋아지면 귀신 같이 와가지고 말을 건대요. 트위터 사람들의 좋은 점 같아요.
 
브루넷: 좋은 분들 많죠.
 
소양: 아주 이상한 사람 아닌 이상 누가 어그로 끈다 싶으면 그냥 내버려뒀으면 좋겠어요. 무슨 속으로 그런 말 하는지 모르니까.
 
브루넷: 소양 님은 따뜻하다. 인생 경험을 많이 한 중년의 연륜에서 나오는 따뜻함이 아니라 타고난 성품이 따뜻하신 것 같아요.
 
소양: 문학을 통해 여러 생을 겪어서. 하하. 술 먹고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사람들한테 상담 해줄 때가 있는데 말이 술술 나와요.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읽어온 것들의 총합이 나를 여과해서 나온다 싶어요. 그럴 때도 있어요.
 
 
12. 좋아하는 여성 캐릭터
 
브루넷: 어렸을 때 정말 좋아했던 책은 뭐예요?
 
소양: 좁은 문이요.
 
브루넷: , 저도요! 앙드레 지드 많이 좋아했어요. 좁은 문, 전원교향악...
 
소양: 전원교향악은 싫었어요. 너무 이상한 얘기라서.
 
브루넷: 이상한 얘기지. 이상해서 좋았어요.
 
소양: 제가 지드의 좁은 문에 푹 빠져서 읽고 있으니까 이모가, 그 책이 이모한테서 온 거였어요, 이모가 지드 것 중에 그게 최고일 거다 했어요. 그 다음에 전원교향악읽는데 이건 선을 넘었다 싶더라고요. 그런데 배덕자읽어 보면 또 싫지는 않았어요. 그런 것도 잘 읽어요. 예를 들어, 처의 감각에서 방랑하는 남자 얘기 같은 것도 잘 읽는단 말예요. 공감해요. 현실인물도 아니고 책 속의 인물이니까. 현실의 인물이라면 때려주고 싶겠죠. 책 속의 인물들은 이해해요. 저도 그럴 때가 있어요. 저도 여자를 사랑해봤고 여자들이라도 어떤 맥락 속에서는 배덕하게 굴 수 있어요. 그런데 제가 지드한테서 굉장히 좋아했던 건 좁은 문이에요. 알리사를 사랑했어요. 좋아하는 인물 셋을 꼽으라는 질문에 알리사를 제일 먼저 썼어요.
 
브루넷: 좋아하는 여성 캐릭터 셋에 들어가나요?
 
소양: 1위로요. 1위라기보다 제일 먼저 생각나요.
 
브루넷: 또 다른 인물은요?
 
소양: 다 어릴 때 읽었던 것만 생각나요. 캐서린을 정말로 사랑했어요.
 
브루넷: !
 
소양: 제 소양 트위터 계정을 처음 시작했을 때 바이오가 그거였어요. “넬리,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 그 말 너무 좋아해요. 그 다음에 이런 말이 이어지죠. ‘린튼에 대한 사랑은 나뭇가지에 달린 나뭇잎 같은 사랑이야. 둘 다 사랑하지만 히스클리프에 대한 사랑은 땅 속 깊이 묻힌 바위 같은 사랑이라 절대 변하지 않아.’ 어릴 때 낭만적인 사랑 얘기를 많이 읽으면서 사랑이 정말 그런 거라고 생각했어요.
 
브루넷: 저도요.
 
소양: 지금도 그런 마음으로 살아요. 폭풍의 언덕은 너무 멋있죠. 거의 완전한 소설이죠.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에 에밀리 브론테가 못 들어간 것은 소설이 그 하나밖에 없어서예요. 너무 신화화된 인물이어서 뭔가 내가 좋아하는 작가로서는 부족한 느낌이었어요. 좋아하는 작품이라고는 할 수 있지만.
 
브루넷: 한 권밖에 못 읽었는데 내가 이 작가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나?
 
소양: . 에밀리 브론테라는 인물의 이미지는 폭풍의 언덕이 장악하고 있는 거죠. 버지니아 울프는 울프로서 자기 작품들을 장악하잖아요. 방점이 다르게 찍힌 것 같아요.
 
브루넷: 알리사는 왜 좋으셨어요?
 
소양: 강렬했어요. 너무나 카리스마 있었어요. 누구는 알리사가 억압되어 있다고, 제롬이 유학가고 하고 싶은 것들 할 때 왜 알리사는 집과 종교에 매여 있느냐고 하는데, 알리사는 사랑의 위인이에요.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어요. 캐서린도 그렇죠. 둘 다 캐릭터로서도 강력하고 작품 전반을 지배하고 있어요.
 
브루넷: 폭풍의 언덕은 제가 왜 좋은지 설명할 수 없지만 무척 좋아한 작품이에요. 요즘 페미니스트 기준으로 보면 히스클리프는 말도 못 하게 폭력적인 남자죠. 대체 왜 저런 남자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할 수도 있죠. 실제로 트위터에서 했던 온라인 독서모임에서 폭풍의 언덕읽었을 때 이게 왜 로맨스인지 모르겠다는 반응도 있었어요.
 
소양: 두 가지 히스클리프가 있죠. 캐서린을 대할 때의 히스클리프와 캐서린 외의 사람들을 대할 때의 히스클리프. 버지니아 울프가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사랑은 우주적인 일이라고 평한 글이 있는데 저는 정말 공감했어요.
 
브루넷: 좋아하는 캐릭터 셋 중에 알리사와 캐서린이 나왔고, 마지막은 소양인가요? 숲 속의 방의 소양?
 
소양: 소양은 아녜요. 소양은 그냥 어린 마음에 매력적이라고 좋아했던 인물이고 그런 인물을 지금은 걱정하죠. 사랑도 하고 걱정도 하고.
 
브루넷: 죽지 않기를 바라죠?
 
소양: , 그런 것 같아요. 세 번째는 사실 어려웠어요. 누구로 하지? 잘 모르겠다. 누가 있을까? 좋아하는 여성 인물은 많은데 정말 좋아하는 여성인물 셋으로 꼽으려니까 어렵더라고요. 체홉의 세 자매에서 마샤? 좋아하죠. 제인 에어 좋아하죠. 그런데 내가 꼽을 때는... 어제 생각하다가 드디어 세 번째 인물이 떠올랐어요. 진격의 거인에 나오는 한지 조에라는 인물이 있어요. 그 인물을 정말 사랑해요. 우리가 영화나 만화나 책을 보면서 그 속에 나온 어떤 여자 인물을 좋아할 수 있죠. 맞아, 정말 멋있어 하면서. 그런데 그 이상으로 내가 정말 좋아하는 캐릭터라고 말하려면 좀 더 지속적으로 계속 사랑하는 게 필요할 것 같아요. 한지 조에는 지난 십 년 동안 제가 가장 사랑한 픽션 캐릭터예요.
 
브루넷: 저는 그 작품을 안 봐서 모르는데 어떤 인물이에요?
 
소양: 한지 조에를 얘기하려면 진격의 거인얘기를 해야 되는데 그럼 정말 씹덕처럼 보일 거예요. 진격의 거인속 세상은 거인이 있는 세계예요. 거인이 나타나 마을을 습격하고 사람들을 죽여요. 한지 조에는 그것을 해결하고 싶은 사람이에요. 그는 거인으로부터 사람을 지키는 군인인데, 군인도 종류가 있거든요. 이 사람은 조사병단에 속해 있어요. 이 세계는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벽이 거인으로부터 지켜주는데 조사병단은 그 벽 밖으로 나가서 거인을 조사하는 업무를 해요. 처음에 조사병단이 됐을 때 한지 조에는 거인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같이 출전한 자기 동료들을 거인이 죽이니까요- 거인을 정말 미워했는데 어느 날 거인을 베어 죽인 후 무심코 거인의 머리를 찼어요. 육중해 보였던 것과 달리 발로 차보니까 그 질량이 굉장히 가벼운 거예요. 뭔가 이상하다 생각해서 그때부터 이 사람이 거인을 사랑하기 시작해요. 거인한테 호기심을 가져요. 지금까지의 접근방법으로는 거인을 이길 수 없어. 거인에 대해 이해할 수도 없어. 그 다음부터 거인을 사랑하게 돼요. 그 캐릭터를 수식하는 말이 거인한테 미친 여자예요. 거인에 미친 괴짜. 팬덤에서는 거인성애자라고 해요. 거인이 자기 동료를 잡아 먹을 수 있는데도 너무 기뻐하면서 거인을 만나러 가요. 거인들을 포획해서 생체실험을 해요. 거인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조사하기 위해 찔러도 보고 고문을 해요. 자기가 그 담당관이기 때문에 고문을 하지만 울면서 고문해요. 너무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면서 고문해요. 거인들한테 이름도 지어줘요. 처음에는 간부들 중에 좀 자유롭게 자기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미친 과학자처럼 나오다가 이야기가 진행되고 동료들이 계속 죽으면서 나중에는 이 한지 조에가 보스(단장)가 돼요. 이 사람이 하고 싶어 하는 건 다른 것이지만 그런 위치에 가서 자기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 줘요. 이런 서사는 운동권 서사예요. 미친 운동권. 진격의 거인에서 군인들이 심장을 바쳐라는 구호를 외쳐요, 일본만화니까 가미가제 같기도 하고 이상한 느낌이 들지만, 한지 조에한테 심장을 바친다는 것은 자기 동료들에게 심장을 바친다는 뜻이에요. 처음에 중성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팬들이 한지의 성별이 뭐냐고 물었어요. 사실 여자 캐릭터로 만들었던 것 같은데 팬들이 그렇게 물으니까 작가가 한지 조에의 성별은 그냥 한지다, 라고 해버렸어요. 여러 정황상 저는 여성이라 생각해요. 굉장히 괴짜고 탐구심이 강하고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동료들에 대한 사랑과 전우애가 있는 미친 여자죠. 그 만화에서 유일한 선배이자 어른. 처음에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괴짜. 진격의 거인주인공이 한지 조에한테 저희가 거인을 무찌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고 묻자 다른 사람들이 다 도망가요. 한지 조에가 그 이야기를 시작하면 밤을 새서 얘기하기 때문에 다들 아, 또 시작이야 하고 피한 거죠. 엄청난 호기심과 열정이 있는 인물이라 좋았어요. 요즘 사람들은 만화를 보면 거기서 그치지 않고 2차 창작을 하잖아요. 2차 창작물에 나타난 한지의 모습도 좋아해요. 운동권식 해석도 있어요. 아니면 이 여자도 어쨌든 여자였다. 그렇다면 그 여자로서의 부분은 어떨까. 이런 것들이 다 재밌어요.
 
브루넷: 작가가 진보적 관점이나 여성주의를 염두에 두고 쓴 작품은 아닐 것 같은데 거인의 머리통을 찼을 때 의외로 가벼웠다는 묘사가 페미니스트가 느끼는 가부장사회를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네요. 너무 크고 재해와도 같고 나를 괴롭히는 세계지만 실상은 공허하다는 면에서.
 
소양: 한지 조에가 보여주는 호기심이라는 것도요. 페미니스트 호기심이라는 개념이 있어요. 신시라 인로라는 군사주의를 연구하는 학자가 한 말인데, 군사주의를 연구하는 페미니스트 학자는 마음이 어떻겠어요. 좋은 말이 안 나오겠죠. 그런데 그 사람이 얘기하는 게 페미니스트 호기심을 가지고 세상을 보면 다르게 보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너무 괴롭지만 어떻게 보면 흥미로울 수도 있다. 흥미로운 것으로 볼 수 있는 힘이 페미니스트 호기심인데 한지 조에한테 그런 게 있어요. 그래서 한지 조에는 현실의 고통을 초월해요. 캐릭터 조형도 멋있어요. 키 크고 안경 쓰고 감지 않은 더럽고 삐죽삐죽한 머리로 나타나요. 그 이야기 자체는 거인을 이 세상에서 없애겠다는 남자애가 주인공이지만 거기 나오는 여자들은 입체적이에요.
 
브루넷: 웹소설도 보세요?
 
소양: 안 읽어봤어요. 그것까지 볼 시간은 없는 것 같아요.
 
브루넷: 로판(가상의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로맨스를 다룬 웹소설 장르의 하나)도 안 보세요?
 
소양: 상수리나무 아래는 웹툰으로 보긴 했어요. 저는 텍스트를 많이 읽으니까 더 이상의 텍스트를 소화할 여력이 없는 것 같아요, 지금은. 시나 소설도 읽고 싶은 만큼 못 읽거든요. 남는 시간에 트위터나 하고. 트위터를 줄이면 더 볼 수 있겠지만 보통 시간이 남으면 트위터를 읽어요. 바쁜 건 아녜요. 전 시간이 많은 사람인데 새로운 걸 보기 위한 마음의 여력이 없어요. 봐야 하는 게 너무 많아요.
 
브루넷: 저는 우울증이 심했을 때 웹소설을 시작했어요. 영상물도 눈에 안 들어왔는데 웹소설은 읽어지더라고요. 워낙 자극적이기도 하고요.
 
소양: 저도 리디북스에 돈 진짜 많이 썼어요.
 
브루넷: 웹소설에요?
 
소양: 만화에 썼어요.
 
브루넷: , 웹툰.
 
소양: 학기 중에 스트레스 많이 받았을 때 정말 말도 안 되는 만화 많이 사서 봤어요. 비엘(BL. Boys Love. 게이들의 섹슈얼한 관계를 다룬 장르). 저 비엘 안 좋아하거든요? 스트레스 받으면 비엘 봐요. 엄청 자극적이고 말도 안 되게 원초적인 걸 봐요. 어떨 땐 좋은 걸 보고 어떨 때는 후진 걸 봐요. 좋은 것의 목록으로 요시나가 후미의 오오쿠, 시이나 우미의 아오노 군에게 닿고 싶으니까 죽고 싶어등이 있고, 후진 것의 목록은 은밀하게 공유하는 것으로...
 
브루넷: 올해 휴학하기로 결심하고 나니까 마음에 여유가 찾아오면서 자기만의 방도 읽어졌어요. 전에는 아무것도 못하겠고 종일 누워있기만 하니까 학교성적이라도 받아야 덜 쓰레기처럼 느껴졌는데 지금은 굳이 그런 증명이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랫동안 미뤄뒀던 인터뷰 원고를 다시 잡고 완성했는데 몇 편 더 해보고 싶어요. 목표는 월간 브루넷.
 
소양: 너무 근사해요. 월간 브루넷.
 
브루넷: 회복된다는 게 뭐가 엄청 좋아진다는 건 아니지만 과거에 내가 하던 걸 다시 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아침에 일어났을 때 죽고 싶지 않고 자기 전에 괴롭지 않고 글도 쓰고.
 
소양: 저도 올해는 여러 가지를 회복해보려고요. 문학에 대한 사랑도 회복했어요. 많은 도움을 받아서. 제 안에서 뭔가 중간결산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어요. 브루넷 님이 이번 인터뷰를 계기로 울프를 좋아하시게 돼서 정말 기뻐요. 어떤 이들이 울프를 좋아하지 못하는 게 저는 이해가요. 울프 이상한 사람이죠. 못된 사람. 진짜 성격이 나쁘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짓궂고 괴팍해요.
 
브루넷: 김언희 시인과 비슷하게 울프도 독자들이 자기 글을 좋아해주는 걸 목표로 쓴 것 같지는 않아요. 비위에 거슬리는 말도 거침없이 썼죠. 자기만의 방에서 여자들이 여자 싫어하지 않냐는 얘기도 했잖아요? 여자들이 여자들의 특성(이라고 알려진 것들)을 너무 미워하고 못 견뎌한다고. 요즘 말로 하면 여성 안에 내면화된 여성혐오를 간파했던 것 같아요. 울프는 세상에 얼마든지 안주할 수도 있는 계급이었는데 끝까지 세상과 불화하다 간 것도 참... 후대 여성으로서 큰 빚을 진 기분도 들어요. 자기가 쓴 글을 다 파기해 달라 하고 자살했던가요?
 
소양: 아닐 걸요. 울프는 일기도 출판될 걸 염두에 두고 쓴 사람이에요. 저는 울프의 일기도 정말 좋아해요.
 
브루넷: 울프 같은 사람의 흠결은 여성혐오자들에게 얼마나 좋은 먹잇감일까요. 남성 명망가들한테는 별일도 아닌 게 여자이기 때문에 더 두드러져 보이는 게 있어요.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이번에 다시 읽었을 때 한 줄 한 줄 바로 흡수되는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저도 처음에는 울프의 글이 어려웠고 읽기도 싫었어요.
 
소양: 울프의 문체에 진입하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처음에는 낯설어 보이지만 일단 진입하면 잘 읽혀요. 소설도 그래요. 울프 소설도 전혀 어렵지 않아요.
 
브루넷: 말과활아카데미 박경선 선생님 번역수업에서 다뤘던 텍스트에 울프가 여러 번 인용 됐어요. 그때 좀 읽어둔 게 이번에 울프 읽는 데 도움이 됐어요.
 
소양: 어떤 텍스트에 울프가 인용됐어요?
 
브루넷: 마가렛 월터스가 쓴 페미니즘이란 얇은 책인데 여성사에 중요한 페미니스트들이 많이 언급돼요.
 
소양: 울프는 페미니스트예요. 자기가 그런 라벨을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간에 그 사람의 생각은 페미니스트적이에요. 전쟁에 대해서만 쓰는 게 위대한 문학이 아니라고 했죠. 여자들의 생활에 밀착한 것도 중요한 주제다. 중요한 문학적 주제가 되어야 한다.
 
브루넷: 그리고 여러분도 쓰라고 하잖아요. 여러분도 쓰라고. 어떤 보상과 평가가 따를지는 제쳐두고 일단 그냥 쓰라고. 여자들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기록이 우리는 너무 부족하다고.
 
소양: 저는 처음에는 저의 선생님 때문에 페미니스트가 됐고 그 다음에는 울프 때문에 페미니스트가 됐어요.

브루넷: 자기만의 방이 사랑받고 계속 읽히는 이유를 알겠어요.
 
소양: 다루는 문제들이 생생하고 복합적이거든요. 여성의 역사, 여성적인 것의 가치, 페미니스트 미학 등 다양한 주제를 날카롭게 다뤄요.
 
브루넷: 셰익스피어의 누이를 상상해낸 것도 너무 대단해요. 인용하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해야 될 정도로 전문이 명문이에요.
 
소양: 사람들이 인용을 잘 못하는 것 같아요. 자기만의 방과 500파운드도 자의적인 인용이 많아요.
 
브루넷: 부르주아 여성을 위한 페미니즘으로 오해 받을 여지가 많게 인용됐던 것 같아요. 저는 울프를 이해하기 위해 고전부터 해서 많은 독서가 필요했어요. 그런데 소양은 십대 때 이미 울프와 사랑에 빠졌으니 대체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던 거예요?
 
소양: 그땐 정말 문학소녀였어요.
 
브루넷: 오늘 긴 시간 얘기 나눠주셔서 감사해요.
 
소양: 이 많은 걸 어떻게 다 푸실지. 어떤 건 그냥 풀지 마세요.
 
브루넷: , 그럴게요.
 
 
책의 의미는 -일어나고 있는 일이나 말하고 있는 것과 동떨어진 곳에 있는 경우가 아주 많고, 다른 사물들 그 자체가 작가와 맺고 있는 관계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당연한 노릇이지만 포착하기 어렵다. 특히 이것은 브론테 자매와 같이 작가가 시적이며, 그가 의미하는 것이 사용하는 언어와 불가분의 관계이고, 그 자체가 어느 특정한 관찰이라기보다 하나의 기분일 때 더욱 그렇다. 폭풍의 언덕제인 에어보다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다. 에밀리기 샬럿보다 더 훌륭한 시인이기 때문이다. 샬럿은 글을 쓸 때 웅변, 광채, 정열을 가지고 나는 사랑한다’, ‘나는 미워한다’, ‘나는 괴롭다등으로 말했다. 그녀의 경험은 격렬하기는 하지만 우리 자신과 같은 수준에 있다. 하지만 <폭풍의 언덕>에는 가 없다. 가정교사가 없다. 고용주도 없다. 사랑이 있지만, 그 사랑은 남녀의 사랑이 아니다. 에밀리는 훨씬 종합적인 개념에서 영감을 얻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창조의 욕구를 불러일으킨 충동은 그녀 자신의 괴로움이나 그녀 자신의 상처가 아니었다. 세상의 거대한 무질서를 내다보고 그것을 책 속에서 통합시킬 힘을 자신에게서 느꼈다. 그 대단한 야심은 그 소설- 작중인물들의 입을 통해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반쯤 방해를 받지만 훌륭한 확신에서 나온 투쟁을 통해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나는 사랑한다’, ‘나는 미워한다’, ‘나는 괴롭다등이 아니라 우리 모든 인간 족속이나 너희 영원한 힘(……)’이다. 그 문장은 마무리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그렇게 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가 우리에게 그녀 자신이 그렇게 말할 것임을 느끼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것은 매끄럽게 구사되지 않는 캐서린 언쇼의 입을 통해 터져 나온다. “다른 것은 사라지더라도 그가 남아 있다면, 나는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이 남아 있고 그가 사라져 버린다면, 우주는 낯선 존재가 될 것이며 나는 그것의 일부처럼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 지음, 박인용 번역보통의 독자』(함께읽는책, 2011)에 실린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

 
만약 내가 이 지상의 것이어야 한다면 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무엇일까? 이 세상에서 내게 큰 불행은 히스클리프의 불행이었어. 그리고 처음부터 나도 각자의 불행을 보고 느꼈어.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무엇보다도 생각한 것은 히스클리프 자신이었어. 만약 모든 것이 없어져도 그만 남는다면 나는 역시 살아갈 거야. 그러나 모든 것이 남고 그가 없어진다면 이 우주는 아주 서먹해질 거야. 린튼에 대한 내 사랑은 숲의 잎사귀와도 같아. 겨울이 돼서 나무의 모습이 달라지듯 세월이 흐르면 그것도 달라지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어. 그러나 히스클리프에 대한 애정은 땅 밑에 있는 영원한 바위와도 같아. 눈에 보이는 기쁨의 근원은 아니더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거야. 넬리.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 그는 언제까지나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어. 나 자신이 반드시 나의 기쁨이 아닌 것처럼 그도 그저 기쁨으로서 아니라 나 자신으로서 내 마음속에 있는 거야.”

-에밀리 브론테 지음, 공경희 번역, 폭풍의 언덕』(푸른숲주니어, 2006).